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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반도 역대급 방탕했던 막장 임금 '충혜왕'

by 파베누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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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한 패륜은 기본이고 마음에 드는 여자면 (새) 엄마건 유부녀건 상관없이 일단 먼저 범해버렸던, 희대의 폭군 '연산군'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강간범으로 기억되는 왕. 

'충혜왕'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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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볼모로 잡혀간 "충혜왕"


1315년 고려의 임금 '충숙왕'이 귀여운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충혜왕'

맏아들로 세자의 신분이 된 그는 13살이 되던 해에 어느 세자들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왕이 되기 전 원 황제를 보필하고 원의 권력자들과 교류하며 원 황실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려의 국왕이 가차 없이 교체되어버릴 정도로 원의 간섭이 심했던 시기였다.

충혜왕은 원나라에 가서 술이나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훗날 희대의 만행을 저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가 15살이 되자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아버지 '충숙왕'이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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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었지만 다시 원나라로 끌려간 충혜왕


비워진 국왕의 자리는 세자 시절 만난 든든한 빽 덕분에 '충헤왕'이 차지하게 된다. (1330년) 하지만 그는 재위 2년 만에 쫓겨나게 된다. 사춘기가 심하게 왔는지 즉위 후에 하는 거라고는 사냥놀이나 술판 벌이기 같은 망나니 짓뿐이었다. 또한 왕위를 빼앗긴 충숙왕이 아들을 내쫓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충혜왕이 반력을 도모하고 있다는 무고와 함께 망나니 같은 악행을 빌미로 폐위된 것이다. 

결국 2년 만에 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긴 충혜왕은 서글피 울면서 다시 원나라에 잡혀가게 된다. 이때부터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한 그는 본격적으로 개망나니 짓을 하기 시작했다. 

원나라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개판을 치고 다녔는데, 이를 도저히 참다못한 황실에서는 "이 망나니는 아비가 있는 곳에서 올바르게 지도받아야 한다"는 차원으로 고려로 돌려보냈다. 

터덜터덜 고려에 돌아온 충혜왕을 보며 아버지 '충숙왕'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망나니 같은 놈"

 

물론 충혜왕의 폭력성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었다. 여하튼 충혜왕은 이런 냉대속에서 이를 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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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왕이 된 충혜왕의 만행들


그러다 7년이 지난 1339년,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 자리를 다시 충혜왕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사달이 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재위 내내 사냥을 끝도 없이 즐겼다. 사냥을 즐기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국정은 살피지도 않았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민간에 해약을 끼치는 것이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연쇄 강간마였다는 것.

왕이 서모인 수비 권 씨와 정을 통하였다.

-고려사 충혜왕(후) 즉위년 5월-

복위 한 그는 먼저 자신의 장모를 겁탈하고 아버지의 여자, 즉 새어머니 '수비 권 씨'를 간통해버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충혜왕은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의 정실부인 '경화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두 번 향연을 베풀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경화공주도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연회가 끝났음에도 나가지 않던 충혜왕이 남리 저물자 공주의 침실로 들이닥쳤다. 공주는 울며불며 저항했지만 충혜왕은 무리들을 시켜 그녀의 사지를 붙잡고는 겁탈을 하게 된다.

경화공주가 전왕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끝이 나도 전왕이 취한 척하며 나가지 않고 있다가, 해가 지고 난 후 공주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가 놀라 일어나자, 전왕이 송명리의 무리로 하여금 그 몸을 붙잡게 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그 입을 막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는 간음하였다.

-고려사 전요-

다음날 수치스러움과 분노를 느낀 공주가 원나라로 돌아가려 하자 충혜왕이 감금시켜버리는 짓까지 해버렸다.

1341년 3월에는 권항공이란 자의 둘째 부인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는 간통하려 했는데, 심부름하는 놈이 먼저 간통해버려서 둘 다 때려죽인 일도 있었다.

3월, 옹이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부인 강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호군 '박이랄적'으로 하여금 그를 궁중으로 들이게 하였다.
박이랄적이 먼저 간음하고 일이 발각되자, 왕이 노하여 모두 때려죽였다.

-고려사절요 충혜왕(후) 2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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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예쁜 처녀의 소식을 듣고 범하려고 갔는데, 주인집 노파가 딸이 없다며 거절했더니 모두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처음에 폐행 최원이 왕에게 고하기를,
"진사정동에 처녀가 있는데 아름답고 곱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왕이 그와 함께 그 집에 가서 수색하였는데, 주인집 노파가 본래 딸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왕은 그 노파가 딸을 숨겼다고 의심하다가 또 최원이 거짓말을 했는가 의심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고려사절요 충혜왕(후) 2년 4월 -

 

어느 날은 배전이라는 재상을 원나라로 파견 보낸 후 배전의 아내와 그 아내의 동생을 2:1로 겁탈해버리는 만행도 저질렀다.

 기묘 밤에 왕이 재신 배전의 집에 행차하여, 그 처와 <그 처의> 아우 김오의 처를 간음하였다.
이때 배전은 원(원나라)에 있었다.

-고려사-

 

물론 내시들의 아내도 피해 갈 수 없었다.

11월, 내시 전자유의 진에 행차하여 그 부인 이씨를 덮쳐 간음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유가 처와 함께 도망갔다.

-고려사절요 충혜왕(후) 2년 11월-

이 외에도 예쁜 여자면 죄다 겁탈해 버리는, 믿기 어려운 짓만 골라하는 어마 무시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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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을 일삼다가 원나라로 잡혀가는 충혜왕


한편, 충혜왕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 궁궐을 짓는다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강행했고, 마구간을 만들기 위해 민가 100개를 철거해버리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보였다. 이때 백성들 사이에서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에 겁먹은 백성들은 아이를 안고 도망쳐 숨었는데, 그 틈을 타서 불량배들이 도둑질을 하곤 했다.

당연하게도 이처럼 충혜왕의 막장 행보의 결과로 많은 신료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황제는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고, 황제의 명을 받은 원의 사신이 충혜왕을 보자마자 발로 걷어 찬 뒤 결박해 버렸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 차림으로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정동성에서 조서를 듣는 도중에 타적과 내주 등이 왕을 발로 차고 결박하였다.
왕이 급히 원사인 고용보를 불렀지만, 고용보는 왕에게 도리어 욕을 하였다.
왕의 사신들이 모두 칼을 베어 들고 왕을 시종하는 군소들을 체포하였다.

-고려사 충혜왕(후) 4년 11월-

 

이처럼 국왕이 구타를 당해도 고려의 신료들은 저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원나라로 압송되어가는 도중 날이 추워 지방관에게 이불을 달라 했더니 그 지방관이 말했다.

"왕이 탐욕과 음행으로 인해 죄를 얻었는데, 또 제 불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할까요?"

이런 굴욕을 겪으며 원나라에 도착한 충혜왕을 보고 원 황제는 이렇게 질책했다.

"그대는 사람들의 임금이 되어서 민(백성)을 약탈함이 너무 심하였으니,  그대의 피를 천하의 개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짐이 죽이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이에 그대를 게양으로 유배 보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고 가라"

-고려사절요 충혜왕(후) 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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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복위 4년 만에 폐위되어 유배를 떠나게 된 충혜왕. 유배지로 데려가는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충혜왕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왕이 역의 수레로 빨리 달리니 고생과 어려움이 매우 심하였는데, 게양에 이르지 못하고 병자에 악양현에서 훙거하였다.
혹자는 독약을 먹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귤을 먹고 사망하였다고도 하였다.

-고려사절요 충혜왕(후) 5년 1월-

 

 

30세의 나이로 유배지에 도착하기 전에 돌연 사망하게 된 것이다. 항간에서는 독약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귤을 먹다 사망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두 차례나 왕위에 올랐지만 믿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폐위된 충혜왕.

그의 죽음이 만천하에 알려지자 슬퍼하는 이가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고려의 백성들을 기뻐서 날뛰며 '드디어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보게 되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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