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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힘들게 고향으로 돌왔지만 환영받지 못한 여인들 _ 환향녀

by 파베누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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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붙잡혀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

그녀들은 타국에서 어떤 생각으로 버티며 살았을까.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들은 행복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녀들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포로로 끌려간 여성들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조선이 수많은 굴욕을 겪게 된 병자호란.

당시 도성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길 여기저기 시체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그 시체들 사이로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끔찍한 일은 이뿐만 아니었다.

조선의 임금 '인조'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3번 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항복을 행했다.

청나라는 항복의 대가로 수많은 남녀 조선인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조선의 인구 1000만 명중 60만 명이 포로였는데 그중 50만 명이 여자였다.

청나라 군인들은 조선 사대부집안의 여인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끌려간 여인들은 노예가 되었다.

거기에 여인들은 청나라 남성들의 성노리개로 전락됐다.

 

 

 

 

포로 송환을 위한 노력


그녀들을 구출하려면 주인들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것을 '속환'이라고 불렀다.

조선은 포로 송환에 노력을 기울였다.

돈이 있는 양반들은 잡혀간 딸을 데려오기 위해 거액의 돈을 주었다. 

이러한 일들을 몇년 간 겪고 나서야 수많은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환향녀 (돌아올 / 고향 / 여자 ).

뜻으로 풀어 이야기 하자면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기쁨도 잠시뿐


하지만 힘들게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며 손가락질받았다. 

이들의 귀국은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었고, 사대부 양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남편들이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임금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둘째부인을 맞는 것을 허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다른 방법을 내놓는다.

인조는 돌아온 여인들을 홍제원 냇물(오늘날의 연신내)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도록 했다.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 오면 몸이 깨끗해지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인조는 환향녀들을 위한 '면죄부'를 시행했다.

동시에 환향녀들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엄포했다. 

하지만 환향녀들을 향한 핍박은 계속되었다.

이혼은 간신히 피했지만 남편들은 부인을 멀리했다.

돌아온 부인이 죽을 때까지 돌보지 않거나 온갖 핑계를 대서 스스로 집을 나가도록 유도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의 경우에는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다.

많은 돈을 주고 힘들게 돌아왔지만, 가족과 이웃에게 받은 건 경멸과 멸시뿐이었다.

억울하게 포로로 끌려가 치욕스러운 생활을 버티고 돌아온 고향에서 모욕만 당해야만 했던 환향녀들.

그녀들이 할 수 있던 건 오직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은 경멸과 멸시를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기뻐할 수 없는 여인들 < 역사채널e >

 

 

 

당시 사회의 분위기


청나라에 끌려가기 전에 목숨을 끊게 된 여성들도 있다. 

강화도 수비 총책임자였던 검찰사 김경징 집안의 여자들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청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자신의 아내,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까지 자결하도록 협박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여자들에게만 자살을 강요한 것이다.

그런 패륜을 저지르고 본인은 강화도에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놈도 있지만, 관료 중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자가 지천 최명길이었다.

그는 이혼 반대의 근거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 근거로 임진왜란 후에 있었던 비슷한 전례를 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일본군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온 여자들의 이혼에 대한 문제가 생긴 적이 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원해서 간통을 저지른 것'과 '전쟁 중 강간을 당한 것'은 완전히 다른 경우다.

이런 이유로 여자를 버려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근거로는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이혼을 허락한다면, 남자들은 아내를 구하려 하지 않고 재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혼은 옳지 못한 일이라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명길과 같은 생각은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오히려 비웃음만 샀다.

이 일만 보아도  그 시대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이러니 한 점은 이혼을 하든 쫓겨나든 저 여인들을 위해 상당한 거액을 지불하고 데려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가족을 데려오기 위한 재물 마련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글을마치며..


역사적으로 당대에 환향녀라는 단어를 사용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이 언제 왜 만들어진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어감인 '화낭녀'라고 불리우며 욕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비통한 심정을 전부 헤아릴 수도, 이제와서 도와줄 수도 없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 알고 인식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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