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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임진왜란을 활약한 세자였지만 결국 폭군으로 전락한 '광해군'

by 파베누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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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의 활약


전국 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천하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눈을 돌렸고, 195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부산에서 파죽지세로 북진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보고 깜짝 놀란 '선조'는 재빨리 피난을 선택했다. 이때 개성, 평양을 거쳐 명나라와 맞닿아 있는 의주까지 도망을 간다. 

사실 그동안 선조는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선조의 중전 의인왕후는 아들이 없었고, 후궁의 자식들인 정통성이 없는 서자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본인의 아버지가 정통성이 없는 것에 대해 항상 콤플렉스였기에 오랫동안 세자 책봉을 미루어 왔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의주로 가기 전 평양에서 다급하게 서자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게 된다.

 

"광해 너를 세자로 임명한다. 나는 북쪽의 끝 의주로 갈 것이니, 나 대신 정국을 부탁 하마"

 

선조는 총알받이 광해군을 하나 세워놓고 저 멀리 북쪽 의주로 도망갔다. 조선의 왕이 여차하면 나라까지 버리고 갈 생각이었기에 백성들은 실망과 분노가 극에 달해 궁궐인 '경복궁'을 불태워 버리게 된다.

얼떨결에 세자가 된 18살의 광해군은 다행히 영민했던 인물이었고, 본인의 지지세력인 대북파와 함께 임진왜란에서 적지 않은 활약을 하게 된다. 

전국을 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전쟁에 참여한 광해군.

멀리 피난 가 있는 선조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고, 백성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전국 각지의 의병들과 이순신, 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1598년 임진왜란은 끝이 난다.

그러자 재빨리 복귀한 조선의 임금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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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죽음


돌아온 선조는 백성들이 임금보다 세자 광해를 더 좋아하는 것에 질투를 한다. 

그리고 1600년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가 돌연 세상을 떠나고 선조는 새로운 왕비로 '인목왕후'를 받아들인다. 당시 선조의 나이는 51세, 인목왕후 19세였다. 그런데 인목왕후가 아들 '영창대군(1606년)'을 낳게 된다.

그는 정통성 있는 적자였고 내심 광해군을 미워하던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본인이 얼마 남지 않았단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예쁜 아들 영창대군이 2살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게 된다. 선조는 죽기 전 유언으로 신하들을 불러 모아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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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른 광해군


왕위에 오르게 된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

하지만 광해군은 역사 속에서 폭군으로 기억되게 된다. 

당시 당파는 서인, 남인 그리고 북인 중에서도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파와 영창대군의 소북파로 나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소북의 중심들은 처형되었고, 광해군 시대는 '대북정권'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소수 정권이었던 대북파는 꽤나 개방적이었기에 광해군은 개혁정치를 시도하게 되는데 먼저 그 유명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지방의 특산물로 내던 공물을 쌀로 대신하여 내도록 하였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구당 부과하는 세금과 달리,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하는 개혁적인 정책을 펼친다.

이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줄여주고 동시에 지주들에게 세금 부담을 늘려 소득 재분배 기능 역할을 했다. 당연히 기득권 양반들은 심기가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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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광해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줬던 명나라는 쇠약해진 상태였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떠오르던 신흥국가였던 상황에 명나라는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는 후금이 매우 막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파병을 결정한다. 하지만 총애하는 '강홍립'을 불러 얘기한다.

"명나라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파병을 보내긴 하지만 정세를 파악하여 후금에게 투항해라"

이는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중립적인 실리를 얻는 '중립외교' 정책을 펼친 것이다. 물론 당시의 성리학 관점에서 보면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주의 예에 심히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반대파 대다수 신하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광해는 반정의 원인 제공을 하게 된다.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은 누구든지 죽였던 그는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죽게 한다.

또한, 언제나 눈엣가시인 본인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왕위에 위협이 될 거라는 판단에 유배 보낸다. 영창대군의 나이 9살이었고 방 안에 가둬진 채 잔인하게 장작불에 타 죽게 된다. 이에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가 난리를 치자 폐위시켜 버린다.

이 와중에 광해의 무리한 궁궐 사업으로 백성들의 민심이 돌아서게 되고 결국 반대파였던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은혜로운 아버지의 나라인 명나라를 배신하고 야만적인 오랑캐(후금) 놈들과 교류하다니!
"엄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이는 부도덕한 패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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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마지막


1623년 결국 서인 정권은 훗날 '인조'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두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

광해군은 체포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면서 광해군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광해는 부인과 아들 그리고 며느리가 같이 강화도로 유배를 갔는데, 아들은 몰래 탈출하려다 죽게 되고 며느리는 자결을 했다. 이를 본 부인은 화병을 세상을 떠났고 광해는 혼자 쓸쓸히 8년 간의 긴 유배생활을 더 보냈다. 유배지에 데리고 가는 관리가 광해군을 아랫방에 묵게 하는 모욕을 주고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다.

세자 시절 전장을 누볐던 성군의 모습부터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되기 까지 굉장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광해군.

1641년 귀양 생활 18년 만인 67세의 나이로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 광해군의 어진(초상화)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전쟁 등으로 소실되어버린 탓도 있지만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고 '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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