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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연산군을 타락으로 이끈 원흉, 희대의 간신 임사홍, 임숭재

by 파베누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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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아부를 떨며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백성의 삶보다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채운 '간신'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나 국정을 농단한 희대의 간신들이 존재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간신에 휘둘려 비극은 맞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사의 그 수많은 간신들 중에서도 전설급 간신이 존재했다. 임금에게 온갖 미녀를 바치다 못해 남의 첩을 빼앗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여동생으로도 부족해 자신의 부인마저 바쳐버린 미친놈, '임숭재'였다.

 

역사상 희대의 간신 '임사홍', '임숭재'
역사상 희대의 간신 '임사홍', '임숭재' (출처 > 영화 간신)

 

왕실과 친인척을 맺으며 승승장구하던 임사홍


조선 역사상 희대의 폭군이라 하면 바로 '연산군'이 되겠다. 그리고 이러한 연산군의 타락을 적극적으로 도운 원흉이 바로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였다.

먼저 임사홍은 참으로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았다. 비상한 머리로 세조 시절 과거에 급제하였고 당시 임금 '성종'의 예쁨을 듬뿍 받던 관료였다. 직언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패기 있는 모습은 성종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중국어도 잘하고 글씨도 명필이었으니 뭐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그의 출중한 능력 덕분에 그는 문관으로 등용되어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왕실의 인척이었다. 임사홍은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였고 첫째 아들은 예종의 딸 '현숙 공주'와 혼인시켰으며 넷째 아들 '임승재'를 성종의 딸 '휘순 옹주'와 혼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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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 효령대군의 손녀

임사홍의 첫째 아들 ♥ 예종의 딸 현숙공주

넷째 아들 임숭재 ♥ 휘순 옹주

 

이처럼 임사홍 가문은 왕실과 세 번이나 사돈 관계를 맺었으니 무시 못할 뒷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임사홍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4남 임숭재와 '휘숙 옹주'와 혼인한 날 밤에 집에 불이나 옹주가 인근 민가에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당시 사관은 이렇게 논평했다.

임사홍은 소인이다. 불의로써 부귀를 누렸는데, 그 아들 임광재가 이미 공주에게 장가를 가고
지금 임숭재가 또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여 불이 그 집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니, 천도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 

- 성종실록 256권, 성종 22년 8월 27일 신미 5번째 기사 -

이렇듯 임사홍을 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성종의 총애로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 잡고 승승장구하던 임사홍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빚어진 '흙비'사건으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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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대상 임사홍


1478년(성종 9년) 지금의 황사비를 말하는 흙비가 전국에 심하게 내렸고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변괴로 생각해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3사에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고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간언 하였다.

이때 도승지 '임사홍'은 이에 반대하였다. 

"흙비는 재앙이 아니며 또한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데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히 않다"라고 간언 하였는데, 결국 이 일로 해임당하고 말았다. 

이때다 싶어서 임사홍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처음엔 임사홍 편을 들었던 성종이었지만, 대간들의 탄핵 요청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임사홍을 유배시키게 된다. 사실 단지 이 이유에 서라기보다는 왕실 종친이었던 임사홍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한순간에 나락으로 간 임사홍은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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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즉위와 임숭재의 등장


시간이 흘러 성종이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다음으로 나라를 피떡으로 만들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야 임사홍은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는데, 임사홍이 복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 덕분이었다. 임숭재는 연산군의 이복 여동생 '휘숙 옹주'와 혼인한 사이였다. 연산군은 많은 여동생 중에서도 휘숙 옹주를 가장 많이 아꼈고, 임숭재 또한 화려한 말발과 아부로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 임사홍의 부당한 탄핵을 호소하여 임사홍은 덕분에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사홍은 성종이 100년 동안 입에도 담지 말라했던 연산군의 친모에 대한 비극을 밝히게 된다. 

연산군의 친모 '폐비 윤 씨'는 성종의 명으로 사형을 당한 여인이었는데, 이 사실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된 연산군은 분노로 눈이 돌아버린다. 이때 처절한 피의 복수극인 '갑자사화'가 벌어지게 되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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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이후로 흑화에 성공한 연산군은 본격적으로 미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미친 짓은 '채홍사'라는 관리를 두고 팔도의 예쁘고 아름다운 여인을 뽑아 자신에게 바치게 하는 것. 이 채홍사에 임명된 이들이 바로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였다.

특히 임숭재는 전국을 돌며 여자들을 구하러 다녔는데 이때 실록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임숭재를 경상도로 보내어, 아름다운 여자와 좋은 말을 구하게 했는데
모든 도에서 소문만 들으면 도망갔고 뇌물을 셀 수 없이 주었지만 그래도 거두기를 마지않았다.
옥교를 타고 사람들에게 메고 다니게 했는데,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옹위하여 길을 막고 지나가므로
바라보는 자가 '임금의 행차다' 고 말하였다"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 윤 4월 27일 정해 1번째 기사-

 

온갖 뇌물을 받아 챙기면서 임금의 행차에 버금갈 정도로 사치를 일삼던 임숭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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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임숭재를 위해 승지를 시켜 강 가에서 맞이하여 잔치를 열어줄 정도로 무척 총애하였다. 그 와중에 춤과 노래가 기가 막혔던 임숭재는 딴따라의 피를 숨기지 않고 연산군을 위해 선보였고, 연산군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임숭재와 노는 게 어찌나 즐거웠던지 임숭재의 집 사면에 있는 인가(백성들의 집) 40여 채를 헐어내고 담을 쌓아 창덕궁과 맞닿게 하였다.

연산군은 거의 매일 임숭재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면서 밤을 새웠는데, 신이 너무 나버린 임숭재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연산군에게 바쳐버렸다. 물론 그 누이동생은 이미 혼인한 몸이었다. 사실 그동안 남의 첩이 된 자일 지라도 이쁘기만 하면 빼앗아 바치던 놈이었는데, 누이동생까지 바치는 것은 실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연산군의 임숭재의 아내 '휘숙 옹주'와도 간통을 저지르게 된다.

"숭재는 그 누이동생인 문성정 이상의 처를 시침하게 하였으며, 왕은 옹주까지 아울러 간통하였다."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 11월 1일 임오 2번째 기사 -

 

임숭재의 아내 '휘숙 옹주'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자신의 이복동생과 그런 짓을 한 것이니 실록이 사실이라면 심히 어지럽다.

하지만 결국 국정은 살피지도 않고 이러한 폭정을 일삼은 연산군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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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으로 끝나버린 연산군 천하


중종반정 (1506년)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켜버린 것이다. 임사홍은 즉시 반정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20여 일 뒤엔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부관참시 : 중죄인에게 가하는 형벌로, 죽은 후에 생전의 죄가 드러나면,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벌이다. 죽어서도 육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기에 부관참시는 엄청난 형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악질이었던 임숭재는 재수가 어찌나 좋은지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05년 이미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연산군 곁에서 온갖 아부를 떨며 권력을 손에 쥐고 횡포를 일삼았던 '임숭재'

역사에 간신으로 기억될 이 양반은 갈 때도 아주 예술로 가는 양반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이 무엇인가 물으니 이런 유언을 남겼다.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전하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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