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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한국 비극사 6.25전쟁 '국민방위군 사건'

by 파베누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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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51년 6.25 전쟁 시기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중이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은 1.4 후퇴를 실시하게 된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퇴각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이 우리의 자유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 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습니다."

중곡군과 맞서 싸우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는 '국민방위군'을 창설하였다. 지원 대상자는 17-40세 남성이었는데, 무려 50만 명이 넘는 장정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 걸고 지원하였다.

이들 중에는  "나는 화랑도 정신을 갖고 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이다."라는 혈서를 쓰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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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된 국민방위군
소집된 국민방위군 <출처: 나무위키>

 

 

오늘은 6.25 전쟁시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뜻을 모았던 장정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국민방위군 창설


국민방위군의 간부는 대부분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대한청년단 - 여러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한 대한민국의 우익청년단체)

대한청년단은 청년 정치단계로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만들어진 단체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성모'가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추천하여 단번에 준장으로 임관되어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부사령관은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들 모두 사관학교 출신은 커녕 군대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모집된 국민방위군에 책정된 예산은 209억 원이었다. 

하지만 이는 50만 명의 병사들을 입히고 재우는데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 정신 나간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본인들 욕심에 횡령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희대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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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국민방위군


1.4 후퇴 시기. 서울을 빼앗기게 된 정부는 50만 명의 장병들을 대구, 부산 등지로 남하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는 유례없이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 혹한 상황 속에 그것도 걸어서 가야만 했다. 하지만 간부급들이 횡령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숙식, 보급, 군복, 겨울피복 등 그 어떠한 것도 지급하지 않고 걸으라 지시한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간부들은 이들을 챙길 예산은 측정부터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의 방위군 장병 중 무려 약 12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지원했던 병사들은 전투는커녕, 총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동사, 아사,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었다.

이런 참혹한 죽음의 행진은 결국 탈출한 국민방위군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유감이다."

 

뻔뻔하게도 이런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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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방구장관 '신성모' 역시 "국민방위군이 굶어 죽어간다는 얘기는 북한이 퍼뜨린 유언비어" 라며 선을 그었다.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승만 정부는 현장조사와 함께 재판이 진행됐고 결과는 사령관 김윤근은 무죄, 부사령관 '윤익현'에게 징역 3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사실에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되고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국민부장관 '신성모'를 해임했다.  또한 국회 재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착복한 금액이 현금 23억 원, 쌀 5만 2천 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정치계로 흘러간 수천만 원의 자금 사실까지 드러났다. 결국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을 해산하게 되고 7월 19일,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현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 그리고 8월 12일 이들 모두 야산에서 공개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에게 총살형을 집행한 순간
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에게 총살형을 집행한 순간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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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을 너무 일찍 처형하는 바람에 이들로부터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과 그 자금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못하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6.25 전쟁 중 나라를 지키려고 지원한 50만 명의 자국민을 끔찍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던 최악의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국군 통역장교로서 그때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리영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 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사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리석은 정부때문에 꺼져간 생명들의 무게에 마음이 아프지만, 애초에 전쟁이 없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크다.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그분들의 송고한 정신과 희생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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