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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사요약 14편] 조선의 마지막과 일제강점기의 시작

by 파베누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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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근대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었다.

그들의 노력처럼 민중들에게 국가 주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회를 설립하였다면 한 나라의 이권도 쉽게 빼앗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과 기존의 기득권층은 이를 거부하였고

본인들의 정권을 위해 전근대적 전제주의를 선택한다.

(전제주의 :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지배자가
법이나 제도의 구속을 받지 않고 통치하는 것)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은 국민이 아닌

고중 한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

위기상황에 놓인 국가는 어떠한 결과를 겪게 되는지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일어난 조선의 마지막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조선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한 일본의 계략

한반도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일시적으로나마 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외세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는데,

1902년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게 된다 (영일동맹)

그리고 2년 후인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당한 적이 있던 일본은 

10년 만에 힘을 길러 공격을 할 준비를 끝낸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종은 이 전쟁에서 중립국임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고종의 선언은 무시한 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립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일 의정서

조선은 일본이 필요할 때마다 땅.
즉, 군용지를 마음껏 쓸 수 있다.

 

결국 대한제국은 철도, 군사기지 등 수많은 토지를 강탈당하게 되었다.

또한 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도와주었고 러시아와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난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는 러시아가 조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드디어 1905년 꿈에 그리던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던 일본은 강대국들의 간섭에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는 일도 있었기에 서두르지 않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일본은 먼저 미국과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The Katsura-Taft Agreement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주변 나라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서로 묵인한다는 뜻이었다.

 

그 후 일본은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추진하는데

이때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조선을 지배할 것을 인정하게 된다.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일본은 방해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조선에 온 '이토 히로부미'

1905년 11월 한반도에 도착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그는 먼저 고종을 위협하며 '한일 협약안'을 강압적으로 체결하려고 했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것이기에 고종만 도장을 찍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고종은 끝내 조약 승인을 거부했다.

거부는 했지만 신하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그리고 고종 대신 조약에 찬성한 대한제국의 신하 5명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이완용

이들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은 '을사오적'으로 불리게 된다. 

고종은 도장을 찍지 않았지만, 회피해버렸고

일본과의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군'을 빼앗겼다.

다른 나라와의 모든 소통할 수 있는 자격은

일본에게 있음을 의미했는데 사실상 이때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해 조선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가 된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분노한 민중들은 들고일어나

의병활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통곡을 하였고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 자결까지 하는 이들도 많았다.

한편 본인이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을사조약을 인정할 수 없었던 고종은 

이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게 된다.(헤이그 특사)

먼 길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한 이들이었지만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열강들의 무시로 인해 어떠한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서로를 묵인하기로 협의한 상태였기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파견 소식을 알게 된 이토 히로부미는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외교권이 없는 고종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모습에 화가 난 그는

이완용을 불러 질책한 뒤 고종의 퇴위를 강요한다. 

 

 

 

행정권을 빼앗긴 대한제국

1907년 7월

아무 힘없는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조선 27대 임금 순종.

허수아비에 불과한 마지막 왕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의 협조로

'정미 7 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빼앗고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린다.

한일 신협약(정미 7 조약)

1907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 조처로 체결한 7개 항복의 조약

 

이에 분노한 민중들은 전국적으로 반발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러한 의병활동이 크게 일어나자 일본은 의병 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여기서 살아남은 의병 세력은 만주로 피신해 이후 독립활동을 하게 된다. 

 

 

'한일병합조약' 체결로 시작된 일제 강정기

 

이왕용의 사진

 

1909년 7월

대한제국의 사법권에 관한 업무를 일본이 가져간다는 내용의 

'기유각서'가 이완용에 의해 체결된다.

사법권까지 넘어갔기에 대한제국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이러한 암흑기, 민중의 분노가 대표로 표출된 

하얼빈역에서의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저격을 성공한 안중근의 마지막 외침

"대한독립만세"

그러나 이러한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9일 친일파 이완용은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조선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경술국치, 국권을 빼앗긴 치욕스러운 날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518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으며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한국사 요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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