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했던 불교.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국교로 지정되어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사실상 지배계층에 속할 만큼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승려들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존재로 몰락한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오늘은 불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불교계의 몰락
종교인 그 이상의 지위를 가졌던 불교는
고려 초기부터 불교의 폐단이 문제가 되었지만
( * 폐단 : 어떤 일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옳지 못한 경향이나 해로운 현상)
고려 말이 되어서는 권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폐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지배층과 연관되어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된 승려들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노비들을 거느리며
굉장히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처럼 타락에 빠져 세금도 내지 않고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던 승려들을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롭게 부흥한 '신진사대부'들로
고려 말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 세력이다.
"속세를 벗어나 부처의 가르침을 받으며 도를 깨우쳐야 할 승려들이
몰래 여인들과 정을 통하여 자손을 보고 재산이나 축내며 타락에 빠져대니
고려가 망해가는 건 불교 때문이다."
이들은 승려들을 위와 같은 이유로 맹비난하였다.
실제로 고려 후기부터 부녀자들이 절에 놀러 와
남편 몰래 승려들과 간통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지가 후처 김 씨와 더불어 절에 가서 수일 동안 머물렀는데,
밤에 김 씨가 중(승려)과 간통하므로,
이지가 간통하는 장소에서 붙잡아 꾸짖고 구타하니,
김 씨가 이지의 불알을 끌어당겨 죽였다."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3일 임진 2번째 기사-
조선시대에도 승려와 정을 통하다가 남편에게 들킨
부인이 남편의 불알을 뜯어 죽인 사건도 있었다.
심지어 불교 내에서 본인들끼리
치열함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절에서 법회를 열 때 옆에 있는 유명한 절과 경쟁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인력을 동원하여 세력 경쟁을 하였다.
그러다 그 경쟁이 과열되어 승려들끼리 몸싸움이 시작되었고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 야단법석 :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던 모습에서 비롯되어
사람이 한데 모여 서로 다투며 떠들고 시끄러운 모습)
유교 국가 '조선'의 불교탄압
시간이 흘러 이성계의 반란으로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가 멸망하게 되고
유교 국가 '조선'이 건국되었다.
'성리학파'이자 조선 설계자 '정도전'은
(* 정도전 :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던 시기에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
부처가 거짓을 지껄인다는 책 <불씨잡변>을
편찬할 정도로 불교는 이미 종교계의 이단이자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불교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조선은 유교를 떠받들고 불교를 억압한다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 숭유억불 : 조선 왕조가 500년 내내 불교를 탄압한 정책)
승려들을 억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천여 동안 숭배받았던 불교는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조선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회 지배계층의 지위를 가졌던 승려들의 삶은
노비만도 못한 천민의 계층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다.
사원부터 토지, 노비 등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승려들은
국가를 위한 힘든 공사 및 갖은 노역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물론 무보수였는데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정한 부역에 참여하여
몇 개월을 무보수로 노역함으로써
승려 자격증인 '도첩'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도 초기에는 그나마 가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조차 폐지되어
승려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어 버린다(금 승법).
( * 금승법 : 조선 전기의 불교 억압 정책)
또한 지금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교회처럼
원래는 절도 길가다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불교 탄압이 있으면서 강제로 산지에 사찰을 이전하게 되었다.
금승법으로 성종 시기부터는 승려들의 도성출입까지
금지되어 출입을 시도할 시에는 매질까지 당하게 되는데
연산군은 강제로 승려들을 노비로 환속시켜
사냥할 때 몰이꾼으로 사용하였다고도 하니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사찰들은 유생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 *유생 : 유교를 신봉하고 이를 본업으로 하는 사람)
심심하면 절에 놀러 가는 것을 즐겼던 선비들은
산에 올라갈 때 승려한테 가마를 들게 하는 등
사사건건 트집 잡아 승려들을 농락하였고
승려들의 머리를 돌로 내리쳐 죽여대는 일도 발생하며
괴롭힘이 심해지자 유생들의 사찰 금지령까지 내려질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유생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부처에게 복을 빌었고
유교 사대부들과는 달리 일부 임금 및 왕실 어른들은
불교의 교리를 믿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교사상이 자리 잡히며
불교는 보잘것없는 세력으로 전락했다.
이쯤 되면 조선을 경멸해도 이해가 가는데
놀랍게도 불교계는 대단한 활약으로
'임진왜란'의 영웅이 된다.
임지왜란의 영웅이 된 승려들
일본이 침략해온 임진왜란에서 임금 선조와 신하들은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하는 최초의 승군, '영규대사'
산속 깊은 곳에서 수련을 한 승려들은
웬만한 군인들보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소유하였다.
충청도에서 관군이 도망간 이후 영규대사는
승병과 의병을 모집하여
'한 그릇의 밥도 나라의 은혜이다'를 외치며
왜군들을 물리쳐 청주성을 탈환하게 된다.
또 '조헌 장군'과 함께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쓰러뜨리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육지에서는 영규대사가
왜군과 싸워 전라도를 지켜냈다.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직후 산속에 있던 '사명대사'는
즉시 전국 각지에 있는 승려들을 모집해
왜군들을 저지하며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사명대사는 왜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최악의 적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직접 찾아가
회담을 가졌단 일화도 유명하다.
왜장 가토가 사명대사를 보자
'조선의 보배는 무엇인지' 물었고
사명대사는 의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조선의 보배는 조선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으로
지금 우리 조선에서는 당신의 머리가 최고의 보배요."
적진에 들어가 최고 권력자 앞에서
네 목을 가져가는 것이 모든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조선 최고의 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한 것이었다.
얼마나 패기가 넘치는 성격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이뿐 아니라 포로 석방을 위해 일본에 들어가
협상을 이끌어 내는 활약까지 펼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승병들의(승려 병사)
활약을 높이 사게 되었다.
특히 전투와 지역방어를 잘한 부분에 주목하여
산성을 짓게 하여 산성 방어 임무를 맡겼다.
또한 남한산성에 7개의 절,
북한산성에 11개의 절을 짓게 하여
승려들을 주둔시키고 임금 직속 상비 전력으로
전환시키기도 하였다.
그나마 임진왜란의 활약으로 불교계의 이미지가
조금은 좋아지긴 했지만
5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천대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 조선이 멸망할 때쯤
'갑오개혁'으로 신분이 해방되어 인간 취급을 받게 되었다.
( * 갑오개혁 : 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
사실 조선에서는 승려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양반 사대부들에게 천대를 받아야만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분교계는 사대부들에게 억압되었지만,
당시 천민, 평민, 부녀자들에게는 높은 대접을 받아왔다.
그 옛날 과거에서부터 힘들게 살아남은 불교계는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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