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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사요약 7편]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로 흥하고, '쇄국정치'로 망한 조선

by 파베누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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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형정치' 와 '쇄국정치'의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모습

 

지난 [한국사요약 6편]에서는 '안동김씨'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를 다루었다.

세도정치란, 신하들이 왕보다 높은 권력을 잡고 대신 정치하는 것을 뜻하며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가문의 세력이 강해지는 '정치구조'때문에

'세도가문'간의 세력싸움이 잦았으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단해졌다.

이러한 배경으로 세도가문은 허수아비 같은 왕이 될 인물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그렇게 즉위한 왕 '고종'

그리고 그의 아버지'흥선대원군'이 등장하게 된다. 

7편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쇄국 정치'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로 인한 '세도정치'의 몰락

*고종 (제26대 왕 / 재위 1863 ~ 1907)

'세도정치가문'에 의해 왕이 된 '고종'과 대원군이 된 그의 아버지.

본래 '대원군'은 정치적인 권한이 없었지만,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에 오른 고종이었기에

그를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며 '세도정치를 척결하고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정치'를 하겠노라 선포한다. 

과거 양반들은 '서원'을 운영하기 위해 국민들의 세금을 사용했다.

(서원: 죽은 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가르치는 곳)

하지만 양반은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만 커졌었고 이는 백성들의 삶을 더욱 괴롭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이전부터 많은 왕들이 서원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서원'의 학생 격인 '유생'들의 반발로 매번 실패했었다. 

이번 역시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은 굴하지 않고  몇몇 곳만 남긴 채 전국 1000여 곳의 서원을 패지 했다.

곧이어 한 사람 당 하나씩 내는 세금인 '군포'를 한집당 한 개로 바꾸고,

세금을 내지 않았던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거두게 하는 '호포제'를 실시했다.

동시에 '안동김씨'의 실질적 권력의 상징인 '비변사'를 폐지시킨다.

오랫동안 백성들에게 패악질을 해온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고 당파와 가문 모두 상관없이 포괄적인 '인재 등용'을 지시했다.

'삼정의 문란' 가운데 가장 큰 폐단이었던 '환곡제'의 운영을 개혁하여 '사창제'로 바꾸도록 하였다. 

환곡제(국가에서 운영) : 봄에 곡식을 빌린 뒤 가을에 갚게 했던 제도

사창제(민간 운영) : 곡식을 저장해 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조선사회의 제도

200여 년 동안 기득권층에 맞춰있던 정책들을 개혁했던 것이다. 

조선을 병들게 했던 60여 년의 길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조선은 암흑기를 지나 도약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쇄국 정치'로 인한 조선의 근대화 실패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패배한 뒤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진행 중이었고 

일본은 이미 19세기 전반에 미국에  대패하여 강제 개항 이후 정신과 기술 모두를 바꾸자는

'메이지유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시기였다. 

주변국들의 강제 개혁을 본 흥선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히나 청나라 백성들이 '아편'에 의해 피폐해지는 것을 보고 극도로 경계하였다.

때문에 서양 세력의 '통상 수교 요구'를 군사적 침략으로  여겨 거절을 거듭하였고, 일이 생기고 만다.

이 시기 러시아는 청나라의 땅이었던 '연해주'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아이디어를 고안해낸다.

당시 조선에 거주 중인 프랑스 천주교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프랑스를 끌어 들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바로 지방에 있는 천주교인을 불러들였지만 30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이러한 일을 두고

양반들 사이에서는 많은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천주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양반과 천민의 평등을 이야기는 종교로써

조선의 근본인 '유교사상'과는 전혀 달랐기에 양반들에게는 탐탁지 않던 터에 

천주교를 꼬투리 삼아서 '개혁정치'로 미운털이 박힌 흥선대원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정(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곳) 에서까지  천주교를 금지한다고 하니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며 '박해령'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6년간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과 천주교를 믿는 백성 8000여 명이 처형당하게 되는데

이를 '병인박해(1866년)'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명분으로 조선은 프랑스의 침략을 받게 된다. '병인양요(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는 강화도에 있는 조선 왕실의 귀중한 유물과 책들을 약탈해 갔고

또한 1868년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가 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 시도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이에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통상 요구'에 '쇄국정책'으로 맞서게 된다.

더욱이 미국까지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년)까지 겪으며 전국 팔도에 '척화비'를 세우게 된다. 

척화비의 내용

서양세력과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교와의 교류를 피하게 되어,

끝내 조선은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이 시기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메이지유신'을 성공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전성기를 달리기 시작한 일본은 가문 간의 세력 분쟁이 많았다.

일본 국내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수년 이상 지속되던 때에 각 지방의 영주들을 굴복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의 세력싸움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침략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결국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쇄국정책'의 대가를 정면으로 받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8편에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이야기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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