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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사요약 4편] 조선역사 최악의 굴욕 _ 삼배구고두례

by 파베누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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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수모 _ 삼배구고두례

광해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

이때 후금에선 사이좋았던 광해를 

몰아냈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쳐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1627년)"


왕과 귀족들은 재빨리 강화도로 도망가고,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이 평안도에서 후금과 맞서 싸웠다.
이때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조선이 좀 부담스러워
제안을 하게 된다.


"우리를 형님의 나라로 부르겠다 약속한다면
전쟁을 멈추겠다."


조선은 이를 받아들였고 정묘호란은 끝나게 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후금은 힘이 더욱 막강해졌고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후금의 우두머리,
'칸 홍타이지'는
자신을 황제로 높이고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또한, 

겸사겸사 조선과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했다.


"우리 청나라는 조선에게 있어서 

'형님의 나라'가 아닌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릴 것을 요구한다."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중립외교'를 외치는 

광해와는 달리 인조와 대신들은 명분과 의리로
몰락해가는 명나라를 지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계속되는 청나라의 요구들을 거절했고,
화가 난 청나라(=후금)는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병자호란(1636)”

 

청나라가 침략하자마자 왕족들 상당수는
이미 강화도로 피신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진격한 청나라 군대였다.
결국 인조는 강화도에 못 가게 되고
남한산성에 발이 묶여버렸다.
순식간에 남한산성은 포위되었는데
그 안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주화파"와
오랑캐 놈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척화파"들끼리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45일을 버텼지만, 30만 대군을 더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온 청나라의 황제 앞에
인조는 결국 임금의 옷을 벗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게 된다.
이렇게 인조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굴욕을 겪게 되는데,
이것을 "삼배구고두례"라 한다.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삼전도의 굴욕"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로써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
그리고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청에 인질로 잡혀가게 된다.
이때 청나라는 인질이었지만

장차 조선의 왕이 될 사람이었기에
소현세자한테 잘해줬다.

청나라는 서양문물을 잘 받아들였던 시기였고,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발달한 과학 기술과
문화에 감명을 받았다.

 

눈치 없던 소현세자

시간이 흘러

8년 만에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는데,
청나라를 경멸하는 인조의 마음은 모르고
눈치도 없이 아버지(인조) 앞에서

지나친 청나라 찬양을 하다가
부자간의 이념갈등이 심각해졌다.

이후 소현세자는 인조와의 갈등을 풀어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온몸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고 전해지는데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로 추정된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본인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사형시키고,
아들들을 모두 유배 보내 죽게 한다. 

 

효종

다음 왕위에 오르게 된
"효종(제17대 왕 1949~1659)


형이 죽는 걸 봐서인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한다.
무슨 복수? 청나라를 무찌를 준비.
그렇게 북벌 계획을 비밀스레 준비하지만
10년 동안 준비만 하다가 끝나게 된다.
연이은 전쟁에 부담감을 느낀
일반 백성들은 별로 탐탁지 않아했고,
뒷받침해주는 정치 세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효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현종(제18대 왕 1659~1674)"


당시는 

유교의 예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조선사회였다.
이 예법을 둘러싸고 주요 정치 세력들 간의 싸움으로 번졌고
아버지인 효종의 장례를 치르는데 예송논쟁이 펼쳐지게 된다.

 

* 3년 설(남인 허목) : 효종은 국왕이다. 왕과 사대부에게 적용되는 예는 다르다. 
3년 동안 상복을 입으셔야 한다.

* 기년설(서인 송시열) 채택 : 효종은 차남이다. <주례>에서 청하동례의 원칙을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으셔야 한다.

 


남인은 3년 상복을 입으라 하고
서인은 1년 상복을 주장하면서 싸우게 된다.
또 시간이 지나 현종의 어머니가 죽자
남인과 서인이 예송논쟁으로 또다시 싸우게 된다. 
이렇게 현종의 시대는
예송논쟁으로 시작해서 예송논쟁으로 끝난다.
재위 14년째 현종은 병으로 승하하고
당시 14세에 불과한 어린 왕이 등극한다. 

 

 

#장희빈의 남자 _ 숙종

"숙종(제19대 왕 재위 1674~1720)"

어렸지만 수렴청정 없이 직접 정치를 했다.

(수렴청정:새로 즉위한 국왕의 나이가 너무 어려 
국정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경우에 
왕실의 어른이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처리하는 것)


붕당 간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시대-
숙종이 대단했던 점은
많은 왕들이 신하들과 당파들에게 휘둘리며
왕권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 비해
본인 마음대로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부인들도 이러한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여기서 나오는 부인들이 '장희빈'과 '인현 왕후'이다.

(이전 포스팅에 장희빈 관련 글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둘은 숙종의 눈에 들기 위해 싸우는데,
최후의 승자는 인현 왕후의 몸종 "동이"였다.
장희빈이 인현 왕후를 궁에서 쫓아내고 얼마 후,
늦은 밤에 숙종은 궁을 거닐다
불이 켜져 있는 한 여인의 방을 보게 된다.


"이 밤중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


숙종의 물음에
인현 왕후의 몸종이었던 "동이"는
오늘이 쫓겨난 인현 왕후의 생신이라
간단히 상을 차려 복을 빌고 있다고 답한다.
그렇지 않아도 인현 왕후를 폐위시켜 

마음이 안 좋았는데, 감동을 받아버린 숙종.
그리하여 방의 불을 끄게 되고 -
그렇게 임신한 동이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영조"


숙종 다음으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몸이 좋지 않아 돌연 세상을 떠나고
천민 출신인 동이의 아들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가 즉위하게 된다.
그렇게 예민하고 까칠했던 영조는
희대의 비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5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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