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한국사요약 8편] '강화도 조약' 이후 시작된 조선의 개화기와 '임오군란'

by 파베누 2022. 8. 29.
728x90

명성왕후의 등장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주변국들에 비해 조선은 근대화 발전을 하지 못하였고 쇠퇴했다.

이후 아들인 고종과 아내 민비가 권력을 잡아 정치를 하게 되는데 

'민비'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다. 

이를 시작으로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강화도조약' 체결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워낙 막강했던 탓에

20살이 넘어도 집권을 할 수 없었던  조선 제26대 왕 고종.

그는 아내의 집안 '민씨세력'과 함께 아버지를 견제를 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문'을 계기로

고종과 그의 아내 '민 씨'는 1873년 흥선대원군을 정치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875년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오게 된다.

조선의 경고에도 물러서지 않자 결국 전투가 발생하게 되었고

기술이 우세한 일본군에 의해 패배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강화도조약(1876년)'이 체결된다.

 

1. 일본은 조선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며 '해양측량권'을 허용.

2. 일본인이 조선에서 무엇을 하던 간섭할 수 없는 '치외법권'을 인정.

3. 일본상품에 대한 무관세 등

일본이 서양 제국한테 당했던 불평등한 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행했고

이는 조선이 근대화를 맞이하며 최초로 접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 이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첫걸음이 되었다. 

 

 

조선 개화기의 시작과 '임오군란'

쇄국을 버리고 드디어 개화기에 접어든 조선 (1876년)

근대화가 늦어진 만큼 빠른 개화 정책이 필요했다. 

조선은 주도적으로 여러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개화 정책 총괄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서양의 과학기술 및 병기의 학습을 위해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또한, 군사력 강화가 필요하다 판단하여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훈련은 일본인 교관이 맡았다. 

이때 개화 개혁을 도맡았던 세력은 고종의 아내 '민비'의 가족들. 

즉, '민 씨 세력'이었다. 

개화 정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본인들의 부와 권력에만 집중하였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양반 자녀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급료나 대우가 좋았으나

'구식군대'의 하층민 군인들은 무자비한 차별을 받게 된다. 

1882년. 차별받던 구식군대는 13개월 동안 급료도 받지 못하여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중 그나마 정부가 봉급으로 쌀을 지급하기는 했으나, 본래 받아야 할 급료의 절반도 되질 않았고

뿐만 아니라, 모래와 함께 썩은 쌀이 들어있었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도 어려지자 분노한 구식군대 군인들은 

'위정척사'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임오군란 1882년)

*위정척사

성리학 질서를 수호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요구하며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여 일본인들을 죽이고

별기군을 제압하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던 고종은  결국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재집권에 성공한 흥선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 폐지', '별기군 폐지' 등

다시 개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여 개화기 시기를 맞던 조선을 다시 과거로 되돌려 버린다. 

또한 민 씨 집안을 제압하려 시도하였지만 재빨리 도망간 중전 '민 씨'는 제거하지 못했다. 

이때 민 씨는 이미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기에 청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게 된다. 

이윽고 청의 군대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은 청으로 끌려가 3년간 조선땅을 밟지 못하게 된다. 

 

 

민 씨의 '친청 정책'

흥선대원군이 사라지고 다시 돌아온 중전 '민 씨'

본격적으로 이때부터 청나라에 기대는 '친청 정책'을 펼치며 '민 씨'의 세상이 되어버린다. 

청나라는  조선을 종속국으로 우대해 준다며 청나라의 상인이 조선 전국에서 활동하게 했다.

그렇게 조선의 종주권 강화를 위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은

1.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 배상급을 지급하고

2. 조선에 일본 군대 주둔을 허용하도록 하며

3. 일본 상인들이 조선 전국에서 활동 가능하게 하는 '제물포 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처럼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주도권 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9편  [갑신정변] 이야기로 계속 -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