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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사요약 10편] 명성황후의 만행에 분노한 백성들이 일으킨 '동학농민운동'

by 파베누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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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로써,

'화려한 외교술과 뛰어난 지략으로

조선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

이라며 추대해왔고,

특히 그녀의 마지막은 일본군의 시해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렇듯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던 인물이지만,

근래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이유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명성황후의 만행들 

 

- '민 씨 세력'의 부정부패

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 시간 동안 조선은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원흉은 민비(명성황후), 민 씨 세력이었다.

민비와 고종은 청나라에게 빌붙는 '친청 정책'을

펼치며 온갖 부정부패를 악랄하게 즐겼다.

흥선대원군이 척결한 '세도정치'를 

다시 부활시킨 그녀는 대부분의 주요한 관직에 

민 씨 일가들을 앉도록 했다.

몇 가지 일화 중 하나는

민 씨 세력의 인물 '민형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민비'라는 든든한 뒷배를 믿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욕심쟁이였던 그는 국고에서 본인 주머니로

슬쩍해버린 금액이 70만 냥이라고 한다.

당시 국가의 세입은 480만 냥이 었는데

국가예산 1/7 수준이었으니 엄청난 금액이었던 것이다.

당시엔 민 씨라는 성을 가지고만 있어도

아무도 함부로 못했다고 하니, 그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 사치가 심했던 명성황후

여기에 지지 않고 민비 본인의 사치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데

갑신정변 직후 칼에 찔려 죽기 직전의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준  '알렌'이라는 외국인 의사에게

사례금으로 20만 냥을 주었다.

<호러스 뉴턴 엘런 _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안련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가치로 약 50억 원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민비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결혼할 때는 축의금으로

100만 냥을 내놓았고 이 금액은 

국고 세입의 1/5에 해당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이뿐인가, 미신에 빠져있던 민비는 무당을 불러

굿판 벌이는 것을 즐기며 국고의 10분의 1 가량을

시원하게 써대면서 ,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놓은 국고를 단 1년 만에 써버리는 

대단한 씀씀이를 보여주었다. 

 

- '민 씨'들이 돈을 버는 방법

써도 써도 부족한 돈은 어디서 충당을 했을까?

바로 백성들을 수탈해서 얻은 사치들이었다.

주요 관직에 오른 민 씨 일가들은 벼슬을 돈 받고 파는

'매관매직'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당시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관직을 사서 지방으로 내려가 즐기려 하면

돈을 더 많이 바친 사람에게 관직을 뺏기기도 했으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민 씨에게 뇌물을 지속적으로 바치기 위해

백성들을 더욱 괴롭히고 수탈했다.

이 모든 것은 민 씨가 집권한 후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큰 사건이 터져버리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당시 조선 말기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만민 평등 사상인 '동학'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부패한 탐관오리들 뿐만 아니라

청나라, 일본이 쌀 수탈과 상업 침해로

농민들의 삶은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94년 전라도 고부지역에

부패한 탐관오리 한 명이 등장하게 된다.

그의 이름 '조병갑'

그는 고부에서 군수로 재직 중에 

농민들에게 강제로 세를 징수하고 부유한 농민을

잡아들인 다음 갖자지 죄명을 씌워

2만여 냥의 재물을 빼앗고 

본인 아버지 공덕비를 세운다며

강제로 1000여 냥을 거두었다.

게다가 저수지였던 '만석보'를

농민들에게 만들도록 명령했는데, 

돈을 제대로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 저수지를 사용할 때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러한 만행으로 참다못한 농민들은

녹두장군 '정봉준'을 선두고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다. 

 

 

농민들의 봉기 '동학농민운동'

저수지인 '만석보'를 파괴하고 

관아를 점령하여 착취당한 세곡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선 조병갑을 처벌하고

고부의 신임 군수를 임명하여 

농민들 스스로 해산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을 조사하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서 민란 관련자들을 

심하게 탄압했고, 여기서 사달이 나기 시작한다.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녹두장군 '정봉준'은 각 지역에 통문을 보내

무장된 농민들과 함께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사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 농민군들이었지만

나라의 관군들을 이겨버리는데

이는 정부가 농민들을 제압할 능력도,

제대로 된 군인들도 없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 정도로 조선은 아무런 힘이 없던 상태였다.

그렇게 동학농민군들은 계속 전진하여

'전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백성들이 원한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분 철폐

토지개혁

조세개혁

'사람답게 사는 것 ' 단지 그것만을 요구했다. 

 

 

명성황후의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청일전쟁

전주성 점령은 조선의 곡창지대를 장악한 것이기에

조정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명성왕후인 민 씨는 바로 청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기득권층에 있어서는 농민들이 고통을 받아야

그들이 지금처럼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답게 사는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과 일본이 맺었던

'톈진 조약'을 구실로 일본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사실 일본은 청나라의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 , 

이를 눈치챈 조선 정부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동학농민군에 화해를 요청하며

'전주화약'을 체결한다.

전주화약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집강소 설치를 허락한 조정과 동학 농민군이 맺은 협약

이렇게 수습을 시도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농민들은 해산했지만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절하고

경복궁을 점령해버린다.

이러한 배경으로 조선에 청나라, 일본  

두 나라의 군대가 들어오게 되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외세 세력을 향한 두 번째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의 내정간섭에 앞서 

신분제 폐지, 재혼하는 과부, 과거제 폐지 등

'갑오개혁'을 실시한다. 

일본의 숨은 의도가 있었지만

동학농민운동이 바랬던 요구들이 

이루어진 것에 있어서 의미 있는 결과였다. 

하지만 오로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동학농민군들이 아무리 민 씨,

즉 민 씨 세력을 처벌하고 싶었더라도

조선에 외세 세력이 침입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들은 개혁이 아닌 일본과의 항쟁을 목적으로

다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명성황후는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일본에 도움을 청한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동학농민군 VS 조선 관군 + 일본군 연합군 의

전투가 벌어졌다.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에게

동학농민들은 잔혹하게 폐배 한다.

그리고 결국 녹두장군 '전봉준'은 죽음을 당한다.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전봉준-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 (오른쪽 2번째 인물)

 

1894년 갑오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기에 

아주 중요한 해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했기에 

반봉건적, 반외세를 외치며 아래로는 개혁을 꿈꾼 

동학농민운동은 이후 농민들에게

큰 영향을 준 대규모 민중혁명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승리를 하게 되고 

1894년 갑오년은 일본의 조선을 향한 야망이 

끝내 이루어지는 해가 되어버렸다.

 

 

11편에 [을미사변] 이야기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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