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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사요약 9편] 3일 천하 '갑신정변'

by 파베누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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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로 최측부터 박영호,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이들은 깁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수립했다.

 

'민 씨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은 후 다시 조선에 개화기가 시작되지만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 결국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번 글에서는  이들이 일으킨 정변 '갑신정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

청나라의 도움으로 '임오군란'을 해결한 민 씨.

완전한 권력을 갖게 된 그녀는 '성리학 정신은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청나라식 근대화인 '양무운동'을 롤모델로 삼아 조선의 개화를 준비했다.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필요로 했지만 민 씨는 양반들이 세금을 내는 걸 

반대했기 때문에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들은 어떤 방식의 개화 정책을 추진해야 할지에 의논하며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

<온건 개화파 _ 40~50대>
조선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서양의 과학기술만 받는다. 

온건 개화파는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를 주장하였다. 

 

<급진 개화파 _ 20~30대>
청에 빌붙은 민 씨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조선을 자주적인 독립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청대라와의 사대관계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 도입해야 한다. 

반대로 급진 개화파는 모든 것들 받아들이는 쪽을 주장했는데

유교의 뿌리가 깊은 조선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민 씨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는다. 

1876년.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벌써 9년이 지난 상황에서

받아들여야 할 신문물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조선에서는 고작 전쟁에 대비할 때 사용할 무기 분야에서나  외국기술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급변하는 일본은 지켜본  급진 개화파 4인방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은 

조선의 현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변 나라들의 발전은 날로 앞서가는데, 민 씨 집안은 부정부패로 부와 권력을 쌓는데만 관심이 있으니

변화조차 기대할 수 없는 조선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고, 비밀리에 정변을 준비하게 된다. 

마침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여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 5000명 중  1500명만 남기도 철수를 했고, 

곧이어 청나라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1개의 중대.  150명의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킨다.

 

 

'갑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급진 개화파'

1884년 12월 4일 새벽.

조정에서는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벌여지고 있던 때를 노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손쉽게 상황을 종료하게 된다. 

그 후 고종과 민비에게 청의 군대가 쳐들어 왔으니 대피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고종과 민비가 지내던 '창덕궁'은 매우 넓어 수비하기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경우궁'으로 고종과 민비가 옮겨가게 되었고,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끄는 일본군 200명이 '경우궁'을 호위한다.

그리고 다음날, 급진 개화파들은 조선의 군사 지휘권자들과 권력의 핵심 실세들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곧바로 각 국의 공사관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린다. 

이들은 14개 조 새로운 개혁안을 발표하게 되는데 

<14개 조 정강>

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나라에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를 뿌리 뽑고 백성의 곤란을 구제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가운데 재능이 있는 자는 등용할 것. 
5.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6. 각도의 환곡을 영구히 폐지할 것. 
7. 규장각을 폐지할 것.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막을 것.
9. 혜상공국(보부상 조직)을 폐지할 것.
10. 이전에 유배, 금고 된 사람들의 사정을 참작하여 석방할 것.
11. 4 영을 합쳐 1 영으로 하고 그 안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설치할 것. 육군대장은 세자로 할 것.
12. 재정은 모두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의 의정부에서 회의 결정하고 정령을 공포하여 시행할 것.
14. 정부는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은 모두 없애고 대신과 참찬이 협의해서 처리하게 할 것. 

청나라에 잡혀있는 흥선대원군 송환,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허례 폐지,

문벌 폐지, 인민 평등 권리를 세운 능력에 따른 관리 임명 등 

청나라의 간섭으로 벗어나 평등하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위한 혁신적인 정강들이었다. 

이렇듯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급진 개화파들의 정변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3일 만에 끝난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

뭔가 잘못되었다는 낌새를 느낀 민비는  몰래 궁 밖의 가족들과 연락을 하게 되고 

청나라가 곧 진압을 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된다. 

이에 민비는 '창덕궁'으로 다시 옮겨달라 요청하는데 

이는 수비하기 어려운 창덕궁으로 옮기려는 계략이었다. 

끊임없는 민비의 요청에 급진 개화파는 이 요구를 들어주게 되었고

민비와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정변 셋째 날. 

결국 청나라 군대 1500명의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게 된다.

갑신정변을 도왔던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청나라 병력이 올 때 바로 발을 빼버렸고

남은 급진 개화파의 행동대원들은 격렬하게 싸우지만, 막아내지 못한다.

이렇게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되고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과 후폭풍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너무 명확했다.

500여 년간 이어져 온 유교사상의 조선에서

그들의 주장은 너무나 급진적이고 이상적이었다.

그러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외세 세력의 힘을 빌려 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그들의 행보와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백성들은 일본을 싫어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조차 받지 못하였다. 

때문에 갑신정변 직후 군중들이 일본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일들도 있었다. 

결국 갑신정변의 결과로 일본은 또다시 조선에 요구한다.

1. 조선은 일본에게 사과하고

2. 공사관 화재와 정변 당시 죽었던 일본인들에 대한 피해 배상금을 지급하라

<한성조약>

 

또한 조선에 있어서 청나라의 간섭이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이렇게 청나라, 일본  두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조선에서 청. 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한다.

그리고 이후 청. 일 전쟁의 구실이 된다. 

 

 

10편 [명성왕후]와 [동학농민운동] 이야기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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