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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사요약 11편] 명성황후의 마지막 '을미사변'

by 파베누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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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장례식 _ 조선 정부는 일본이 겁이나서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살해당한지 2년 뒤에나 치렀다.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일본의 요동반도 반납

1894년 조선의 공식 요청으로 동학농민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철수해 있던 청.일 두 나라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발발한 '청일전쟁(1894년)'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하게 된다. 

승리의 대가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요동반도와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이다.

야망 높은 일본의 입장에선 드디어

대륙 진출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지켜보던 나라가 있었으니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위해선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 즉, 

요동반도가 꼭 필요했다. 

일본이 이곳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걸림돌이 되기에 가만 둘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 들어 

일본에게 물어나도록 위협한다.(삼국간섭)

일본은 이미 미국에 크게 진 적이 있었기에

러시아의 요구에 요동반도를 돌려주게 된다. 

이렇게 일본은 요동반도를 뺏기는 굴욕을 맛보았고

모든 것은 국력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본은 이 날의 치욕을 복수로 다짐하며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명성황후의 친러시아 정책 선언

임오군란 ,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동학농민운동 역시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여

가여운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 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저 나라를 제어한다는

'이이제이' 정책을 주로 사용하던 명성황후는 

청나라도 이긴 일본이 러시아에게 꼼짝 못 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지도자가 외세를 끌어들여

백성을 진압하고 학살한 명성황후.

이번에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기대 보기로 한다.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축출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리들이 중용된다.

이에 일본은 위기감을 느낀다.

 

 

일본의 어두운 계획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20년간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그리 공을 들였는데

조선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는 없었고

조선침략을 방해하는 민비(명성황후)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1895년 10월

그들은 한 나라의 왕비를 시해할 음모를 꾸미게 된다. 

조선의 백성들은 민비와 민 씨 세력을 증오하고 있었고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또한 민씨 세력과는 척을 졌으니

왕비의 시해는 일본 낭인들이 맡고,

외관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이라 꾸미기로 계획한다.

이 시해 작전을 주도한 주체는 일본 내각 '이토 히로부미'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미우라 고로'였다.

그리고 친인 신문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와 

편집장, 기자들 그리고 구마모토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

도쿄제국대학교 출신의 극우 엘리트 학생들도 많았다.

대규모 일본군들이 포함되었고

낭인들은 일본 민간인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들의 명성황후 시해 작전은 본래 계획대로라면

목격자가 없을 새벽에 이루어졌어야 했지만,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흥선대원군이 필요했기에

일본군에 의해 끌려오다시피 하였고

결국 날이 밝아질 때쯤이 되어서야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 _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에 있어서 세상 최악의 비극이 시작된다.

일본공사관 수비대와 조선의 협력자들이 이끄는

훈련대 병력은 일본 낭인들과 함께 돌격하게 된다.

경복궁 입구를 지키고 있던 미국인 지휘관

'윌리엄 다이'의 300여 명의 경비대는 

시해 세력을 당해내지 못하여 무너져버렸고

살아남은 경비대를 이끌고 도망친다.

일본 낭인들은 조선인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경복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고종이 있는 곳까지 들어온 그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면서 능욕했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난발하며 궁녀들을 심하게 폭행했다.

이들에게 고함을 친 고종에게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앉히는 무례함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종의 아들인 태자도 다른 방에서 머리채가 휘둘리며

칼등으로 목덜미를 얻어맞았다.

그리고 이곳엔 민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경복궁 북쪽인 건청궁으로 다시 돌격하게 된다. 

이때 이들을 마주친 시위대장 '홍계훈'과 경비대원들이

이들을 제지했으나 일본군에게 사살당하게 된다. 

결국 민비가 숨어있던 건청궁 곤녕합까지 진격한 그들.

민비를 찾아다닌 낭인들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한 명씩 얼굴을 확인하였고

궁녀들 사이에 숨어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였다.

일본의 정식 보고서인 에조 보고서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 검사(음부)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 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들은 민비를 시해하기에 앞서 능욕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당당하게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호통쳤다는 공식 기록과는 달리

조선 말기의 문신 '황현'의 기록에 의하면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낭인들이 칼로 내려쳤다고도 전해진다. 

그들은 그녀의 시신에 이불을 덮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조선의 국모 민비 

즉, 명성황후는 43세의 나이로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을미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 한다. 

당시 낭인들은 그녀를 시해하며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 정부의 지시는 없었고, 

'미우라 고로'의 단독범행이며

흥선대원군이 적극 협조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은 이 사건에 관련된 일본인 모두를 

무죄 방면하였다. 

우리 측은 이 사건이 단지

일본의 조선침략 야망을 위한 것일 뿐

흥선대원군은 이 음모와 무관하다고 말한다. 

민비는 백성을 위한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화해서는 안 되는, 조선을 망친

책임이 있는 최악의 왕비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세계 역사를 봐도 다른 나라의 왕비를 

이처럼 극악무도하게 시해하는 사건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말도 안되는 사건을 뒤로하고 

점점 조선의 국운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12편 [겁먹은 고종] 이야기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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