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를 통일한 최초의 황제
13살 진나라 왕으로 즉위해,
500년 넘게 수많은 나라가 전쟁을 벌여왔던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한 최초의 황제(기원전 211년 ),
'진시황'
중국 최초로 영토와 문자, 법과 제도를 통일했으며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최초로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신의 권위가 불멸할 것이라고 믿었던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잠들 무덤 역시
'죽은 자의 안식처'가 아닌
'살아있는 황제의 궁궐'이어야만 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즉위 초부터 사망할 때까지
70만여 명의 노예를 동원해
39년간 거대한 황릉을 만들었고
그 안에 수많은 보물을 묻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긴다.
바로 2천여 년이 지나도록
그의 무덤의 실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칭기즈칸처럼 단순히 '무덤의 위치를 모른다'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진시황릉은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도굴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발굴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병마용갱'의 발견
1974년 3월
중국 서안의 농부 '양신만'은
우물을 만들기 위해 구덩이를 파던 중
땅속에서 사람과 매우 흡사한 토용(흙인형)들이
잔뜩 묻혀있던 것을 발견한다.
그는 이 사실을 관청에 보고 했고,
중국 정부는 당대 고고학 사상 최대 규모의 발굴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수많은 토용은 '병마용갱'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병마용갱은 '병사와 말의 인형을 묻은 구덩이'라는 뜻으로
병마용갱에서 '용'은 인형 , '갱'은 구덩이를 뜻한다.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병사 토용은 180 ~195cm 키의
늠름한 체격의 모습이었는데 놀라운 점은
병사들의 열굴과 표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귀 모양도 병사마다 각각 달라
실제 사람을 그대로 재현한 것 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는데
'실제 병사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이후 연구 결과가 밝혀지기도 했다.
발굴 당시 연구팀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병마용갱이 어느 시대, 어느 유적인지 알 수 없었다.
진시황릉의 유적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확증이 없었는데
병마용갱이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km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병마용갱에서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무기를 찾으면서 병마용갱이 진시황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후 발굴팀은 추가 발굴을 진행하며 총 3개의 병마용갱에서
병사 8천여 구, 말 500여 필, 전차 130대 등
거대한 규모의 모형들을 발견했는데
이 발견으로 병마용갱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고고학 유적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 부속된 일부 구역에 불과했고
전설 속 진시황의 무덤은 여전히 발굴되지 않았다.
'무덤이 너무 거대하여 훼손 없이 발굴하는 것이 불가능 하니
발굴 기술이 발달할 때까지 작업을 멈추겠다'는
중국 정부의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병마용갱 발굴 당시
채색되어있던 병마 토용이 발굴 후 산화되면서 검게 퇴색되었고,
수습과정에서 머리가 부서진 병마용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
진시황릉을 섣불리 발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도 일리가 있지만,
사실 발굴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진시황릉의 수은 바다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을 만들어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도록 했다.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
진시황이 불멸의 삶을 꿈꾸며
수은을 몸에 바르거나 먹었던 이야기는 유명한데,
수은에 대한 그의 욕망은 죽어서까지 계속됐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에는 수은으로 만든 강과 바다가 흘렀다고 하는데
뿐만 아니라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넣어두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지만 서마천이 실제로 진시황릉을 보았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의 '수은 바다가 허구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그러던 1982년 놀라운 연구조사가 발표된다
황릉 주변 흙의 수은 함량이 인근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지하 궁전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위치의
수은 함류량 수치는 인근 지역보다 20배 가까이 높은 수치가 측정되었다고 밝혔다.
수은은 휘발성이 강한 물질 중 하나인데,
2천 년도 더 지난 무덤에서 이러한 수치가 측정된다는 것은
실제로 진시황릉 안에 거대한 수은 바다의 존재를 의심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기술력과 생산력으로는
수은 바다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층격적인 연구결과가 다시 한번 발표된다.
진시황릉 발굴단이 황릉 바닥의 배수 시설 지도가 존재한다고 밝힌 것이었는데
진시황릉에서 약 100km 떨어진 산시성 쉰양에서
수은을 대거 운반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도 발표했다.
이 연구결과로 '사기'에 남은 기록이 실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커지자
진시황릉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도 진시황릉의 발굴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진시황릉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진시황릉은 이미 도굴되었다는 의혹이다.
진시황릉의 도굴?
영원할 것 같았던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고 4년 만에 멸망한다.
그리고 '항우'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점령해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하기 시작했다.
그때, 진시황릉까지 도굴했다는 기록이
중국 내 고문헌(수경주)에 남아있는 것인데,
30만 명을 동원해 진시황릉을 파헤친 뒤
발굴한 보물을 30일간 실어 날라도 끝이 나지 않았다.
<수경주>
실제로 병마용갱에서 방화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항우가 병마용갱을 훼손했을 것이다'라는
추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 어느 동굴에 들어갔다가
진시황의 시신을 안장한 관을 불태웠다.
<한서>
라는 기록도 발견되면서
'진시황릉 도굴' 가설에 더욱 무게를 싣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진시황릉의 높이가 기록보다 낮은 것이
'도굴로 인한 지형의 파괴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여기에 덧붙여
중국 정부는 진시황릉이 도굴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숨기기 위해 발굴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진시황릉 도굴 가능성의 반박
하지만 중국 내 학자들은
진시황릉의 도굴 가능성에 강하게 반박했다.
오히려 항우의 도굴 기록으로 인해
진시황릉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인데,
이미 항우가 도굴을 끝냈다는 소문 덕에
도굴꾼들이 접근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진시황릉의 규모를 봤을 때
도굴이 건설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는 의견인데
거쳐야 할 관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진시황릉은 4km의 내성과, 6km의 외성에 둘러싸여 있다.
동서 475m, 남북 380m로 매우 넓고
80m의 흙으로 덮여있어 작은 산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기'에 따르면
지하수가 세 번 돌 정도로 깊게 파여 있는 곳에
진시황이 묻혀있다고 하였는데,
이곳을 당시의 기술로는
파내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지하 궁전에는 '수은 바다'라고 할 정도의
수은이 흐르고 있을 텐데
휘발성이 강한 독성물질인 수은에 사람이 직접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중국 내 학자들은 도굴 가능성이 적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진시황릉의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
2천여 년이 지나도록 베일에 휩싸인 진시황릉.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그 위용에 감탄해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진시황릉의 발견으로 인해 8대 불가사의가 됐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유네스코에 등재되기도 했는데
그러나 여기에는 아름답지 않은 비밀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릉이 완공된 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70만 명의 노예들은 물론,
장인과 후궁까지도 모두 진시황릉에 가둬 버렸다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 사람의 무덤을 위해
수십만 명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진시황릉을 발굴하면 보물보다 유골이
더 많이 발견될 것을 염려하여
발굴하지 않는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황제이자, 불멸을 꿈꿨던 진시황
그가 세상을 떠나고 진나라는 고작 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의 무덤만큼은
2천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불멸의 존재로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천하를 축소해두었다는 그의 무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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