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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임진왜란 시리즈 Ep.04 조선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용인전투'

by 파베누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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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관찰사 이광

1592년 4월 13일 (음력)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당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왜군은 

경상도를  부시며 진격하였고

조선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전쟁이 시작된 지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임금 선조는 누구보다 빨랐다.

이미 나라 버리고 망명을 위해 

‘의주’까지 튀어버렸고 

이에 조선의 왕을 잡으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 

생각한 일본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한양이 점령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한 사나이가 한양을 탈환해야겠다는 

용맹한 의지를 다지게 된다.

바로 '이광’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광은 

신속히 근왕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근왕군의 수는 

전라도에서만 4만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충청도에서 8천 명이 합류했고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100 명을 추가로 합류하여

약 5만이라는 대군의 ‘삼도근왕군’이 만들어졌다.

(5만이다 6만이다 말이 많지만 일단 5만으로 이야기함)

 

막상 대군이 모이긴 했지만 문제는 있었다.

병사들 대부분은 근왕군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농사짓는 농부나

일반 백성들에 불과했다.

군인이 아니라 전투 능력은 출중하지 못했으니

그냥 오합지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5만이란 숫자는

엄청난 대군임에는 틀림없었고

5만 삼도근왕군의 맹주는

삼도 여러 장수들의 의견으로

그 용맹한 ‘이광’이 추대된다.

 

 

#이지시와 백광언의 등장

 

이광은 병력을 이끌고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한편

조선의 대군을 본 왜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선군의 기세에 잔뜩 눌려버린 왜군은

점령했던 수원을 버리고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목에 힘이 빡 들어간 이광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런데 이때!

수원 ‘용인’ 지역에

약 600명의 왜군이 지키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된다.

이에 ‘이광’은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용인에 있는 왜군들을 때려잡을 생각에 신이 난다.

그러자 ‘권율’ 장군이 이광에게 말했다.

 

“적이 험한 곳에 있어 쳐다보며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는데 되도록이면 신중히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사기를 축적하여 틈을 엿보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이처럼 권율 장군은 저런 무의미한 피라미들은 신경 끄고 

대군을 이끌어 한양을 진격하는 것이 옳다며 말렸다.

하지만 이광은 코웃음을 치며 명했다.

“선봉장으로 ‘이지시’와 백광언’이 군사 각 1천 명을 합해 먼저 출발해라!”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이지시’와 ‘백광언’은 모두 

북방에서 여진족들을 때려잡은 

경험이 풍부한 장수였다. 

이에 권율은 탐탁지 않았지만 

그들을 향해 꼭 당부했습니다. 

 

“신중하게 하여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우리 대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싸우도록 하라.”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이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을 받고 출격한 

이지시와 백광언의 약 2000명의 선봉대. 

6월 5일 아침, 

선봉대는 용인 인근에 머물러있는 왜군을 발견한다.

그런데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생각보다 병력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백광언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것들 내 힘으로 당장 때려잡을 수 있겠다!” 

 

그렇게 권율 장군의 조언은 개나 줘 버리고 

전면 공격을 시작한 선봉대... 

왜군은 조선군을 보자 신속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사실 왜군은 거짓으로 군사를 후퇴시키며

싸우지 않다가 조선군의 주의가 해이해졌을 때를

노린 것이었는데... 

왜군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으니 

조선군이 잠시 방심하게 되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숲 속에서 왜군들이 등장!

왜군들은 무자비하게 총을 쏴대며 칼을 휘둘렀고 

결국 백광언과 이지시는 탄환에 맞아 사망한다.

 

유감이다.

 

이처럼 명성 있는 두 장수가 

이렇게 속절없이 죽어버리니 

군사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선봉대는 절반 이상이 날아갔지만 

다행히 남아있던 병력은 후방에 있던 

본진과 합류하였다.

 

한편 자신의 부하 600명이 용인에서 

조선군에 포위됐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는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한양에 주둔한 정예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용인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용인엔 

와키자카의 병력 1600명

VS

삼도근왕군 5만의 구도가 된다

 

 

#용인 전투 발발

 

이튿날 6월 6일 아침, 

개운한 잠을 마치고 일어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밥을 막 짓기 시작한 조선군.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발견한 왜군은 

이때다 싶어 무자비한 돌격을 시작했다.

갑옷도 무기도 내팽개치고 

맛있게 식사 중인 조선군들은 

왜군의 공격에 아주 기겁을 하게 된다.

제대로 된 방어선 하나 없이 그냥 뚫려버린 것. 

흰 말을 타고 쇠 가면을 쓴 왜군들이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군사들을 지휘해야 할 충청 병사 ‘신익’이 

오금이 지린 채 재빠르게 도망쳤다.

이에 서로 누가 질세라 경쟁하듯이 

소리치며 도망쳤다.

실록에는 이 현상을 보고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기와 갑옷, 양식들을 죄다 놓고 도망쳤고 

30리 밖에 있던 이광, 김수, 국형 또한 

진을 정돈하지 못하여 남쪽을 향해 도망쳤다. 

이때 유감스러운 건 

일본의 칼날에 죽은 숫자보다 혼비백산으로 

도망치다 깔려 죽은 조선군이 더 많았다.

그렇게 어이없게도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5만의 삼도근왕군은 왜군 단 1600명에 의해 

박살이 나게 된다.

결국 한양 탈환 작전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치욕스러운 패전에 책임을 지게 된 이광은 

결국 파직되어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백의종군 : 벼슬이 없는 말단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참전함


그래도 다행히 

‘권율’은 자신의 부하를 온전히 지켜내 

곧바로 전라도의 방어책을 구상했고, 

약 한 달 후 발생한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에서 

왜군을 뚜드려 패 전라도를 지켜냈으며 

훗날 그 유명한 

‘행주대첩’으로 왜군을 박살 내게 된다.

*행주대첩 : 임진왜란 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한편 5만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 스타 

‘와키자카 야스하루’ 

조선의 장수들은 모두 나약한 겁쟁이라며 

아주 어깨뽕 잔뜩 올라간 와키자카는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그렇게 그는 또 한바탕 큰 역사를 쓰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해상에서 설치는 조선인 하나를 

때려잡겠다며 내려간 것인데... 

그리하여 와키자카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그 유명한 조선인을 마주치게 된다. 

그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이순신 장군 이야기는 이전 포스팅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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