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먹을 시체들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울 힘도 없던 어린 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가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고기 냄새였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지
어머니와 나는 그 뜨거운 고기탕을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오랜만에 먹은 식사에 무척이나 기뻤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우리는 굶주림에 고통받아야만 했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만 같은 시간이 지속됐다.
어느 날 저녁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어머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도 동생처럼
잡아 먹히게 될 것을....
굶주림 앞에선 '인륜'이란 없었다 _ 경신대기근
1600년대 중반
태양열이 감소하여 지구 온도가 약 1도 낮아지게 된다.
이른바 '소빙하기'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끔찍한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중국 강남지역에서 감귤이 모두 얼어붙어 감귤농장이 망하는가 하면
강한 추위에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다 얼어 죽는 등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조선 또한 농경국가로 기후에 의존해야 했기에
유례없는 참혹한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기나긴 가뭄이 지속되어
6월이 다 되어도 비가 한번 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오히려 내리라는 비는 안 오고
느닷없이 굵은 우박이 쏟아져
곡식들은 모두 망가졌다.
심지어 4살짜리 아이와 가축들이
떨어지는 우박에 맞아 죽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나마 6월이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멈추지 않고 휘몰아쳤다.
엄청난 폭우가 조선 팔도를 덮쳤고
그 물난리 통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름부터 시작된 초대형 태풍이 가을까지 지속되며
조선 전국을 휩쓸어 버린다.
연거푸 재앙으로 먹을 것도 사라지니
면역력이 낮아진 사람들과 가축들 사이에서
전염병까지 돌게 된다.
이처럼 1670년 한 해 동안
냉해, 가뭄, 수해, 풍해, 병충해 등으로
조선 전국이 대흉작이 나버린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이렇게 2년간 조선을 아주 개박살 내버릴
경신대기근이 시작된다.
먹을 게 없자 백성들을 유랑자가 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점점 굶어 죽은 시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사람들은 굶주림에 미쳐가면서
끔찍한 행동들을 하게 되는데
혹독한 추위에 견디기 위해 남의 옷을 강제로 빼앗고
심지어 죽은 시체의 옷을 벗겨 입기도 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죽은 시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었다.
찢어질듯한 굶주림 앞에선
인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들은 살기 위해 어린 자식들을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자식들을 죽이고 삶아 먹는
식인행위마저 벌어졌다.
'연산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가 깊은 골짜기 속에 살면서
그의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이른바 순레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하여 얼굴이나 살갗, 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미친 귀신같은 꼴이었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현종실록 19권 , 현종 12년 3월 21일 임신 2번째 기사
전염병 또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때 죽은 이들만 무려
조선 인구 약 1000만 명중 100만 명에 달하였다.
기록은 이렇지만 사실 보고되지 않은 이들도 포함하면
더욱 참혹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경신대기근까지 들이닥쳤으니
이때 조선은 그야말로 대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조선 정부에선 이 끔찍한 대기근에 피해받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진휼소를 만들어 죽을 배분 했다.
과거부터도 그럴 때면 굶주린 모든 이들이 그 죽을 먹고자
죽자고 달려들어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죽을 못 먹은 사람들이 한탄하며
'국물도 없다' 라 한 말이 여기서 유래되기도 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금을 덜 걷는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된다
- 대동법
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세금을 걷게 한 제도.
땅이 있는 양반과 지주에게는 세금을 많이 걷고,
땅이 없는 소작농민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20여 년 뒤 숙종시기에
약 14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경신대기근 보다 훨씬 참혹한
'을병대기근'이 들이닥치게 되고
조선 정부의 노력은 백성들에게 힘이 되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버텨야만 해결될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 EBS 역사채널e
굶주림 앞에선 '인륜'이란 없었다 _ 경신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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