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조선 파국의 중심 _ 명성황후

by 파베누 2022. 6. 10.
728x90

"신이(제가) 전국의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하여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무녀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아!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 데도

전하께서는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출처 :  장사의 신-객주  2015

 

 

많은 백성들이 입을 모아 비난했던 

고종과 민비를 조종하며 조선을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한 무녀의 이야기.

 

조선 파국의 중심 _ 명성황후

 

 

때는 1882년

명성황후 즉, 민비와 민 씨 일가들이 조선의 실권을 누리게 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이는 양반자제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구식군대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게 되는데 

대량 해고사태를 겪기도 하고

13개월이나 밀린 월급을 겨우 한 달 치 받았지만

그마저 모래와 썩은 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분노한 구식군인들은 흥선대왕군과 함께 

명성황후와 그 일가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게 바로 임오군란(1882년)

이때 재빨리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궁을 탈출하였고

아쉽게도 그녀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충주로 피신을 가게 된다. 

공포에 떨며 숨죽이고 있던 명성황후.

 

 

그런데 이때!

은신처에 갑자기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상한 낯선 무녀였다. 

깜짝 놀란 민비는 이 무슨 느작없는 인간인가 하고 보니

이때 무녀가 입을 열었다. 

"중전께서 이곳에 있다고 신령님께 들었습니다.

저와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을 할 것이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출처 :  장사의 신-객주  2015

 

 

 

이 말도 안 되는 구체적인 예언을 명성황후

한줄기 실낱 같은 희망을 얻고

유감스럽게도 자신감까지 얻어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게 된다. 

 

청나라는 개이득! 을 외치며

조선에 상륙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구식군대들을 처벌하게 된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 무당의 말처럼

명성황후는 50일 만에 궁궐로 환궁하여

권력을 다시 되찾게 된다. 

 

 

그 무녀에게 고마움과 영험함을 느낀 명성황후는 

무녀를 궁궐로 들이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그녀는 심지어 이 무녀에게 '진련군' 이라는 작호를 주었는데

뒤에 붙은 '군'은 왕족에게 붙는 호칭이었다. 

이렇게 천민 출신의 차별받던 여자이자 무당이

왕자 급 작위인 군호를 받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이는 그냥 명성황후가 무당에게 푹 빠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부터 조선의 정부는 아주 개판난리진창이 된다. 

엄청난 총애를 받게 된 진령군은 정치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데

명성황후는 진령군의 말이라면 무조건 적으로 다 들어주었다.

관찰사 및 사또 임명 , 즉 인사권에도 개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존재가 된 진령군. 

고위직 관료들마저 이 진련 군에게 아부를 떨기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의남매를 맺고자 앞 다투었고

심지어 진령군을 어머니로 모시고자 머리를 조아리기 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미쳐 날뛰게 된 진령군은

뭐만 하면 굿판을 벌이기 일쑤였는데

특히 고종과 민비의 아들 순종의 병을 고친다고 

금강산 1만 2천 봉에  쌀 한섬과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얹게 하기도 하며

굿판으로 국가의 재정을 뒤흔들었다.

그야말로 국고가 탕진되었는데

그럼에도  고종과 민비는 진령군을 아꼈다고 한다. 

 

관우를 모신다는 이 사랑 듬뿍 받는 진령군은 제대로 돈의 맛을 알았는지

명성황후에게 '서울 북방에 관우는 모시는 사당인 '북묘'를 지으면

큰 덕을 입을 것이라 ' 말하여

나랏돈으로 이 북묘를 건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진령군은  이곳을 본거지로 억 만금을 벌게 된다. 

물론 왕과 왕비도 이곳에서 점도 치고

굿도 신나게 벌였다고 한다. 

 

 

도저히 이 상황을 참다못해

'진령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지만

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선비를 유배 보내버리고 만다.

이 사건 이후로도 물론 많은 강직한 선비들이 

그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도승지는  불같이 화내는 고종에게 

감히 전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사태가 무려 12년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참 중요했던 시기였던 조선 말기에 무당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인데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끝은 오게 되었으니

 

 

1894년

결국 화가 난 민중들이 일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여기서 민비는 활약으로 청일전쟁이 조선에서 발발하게 되었으며

결국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들여 억만 금의 재산을 몰수한 다음

내쫓았다고 한다. 

그녀는 관우 사당인 북묘에서도 쫓겨나

숨죽이고 근근이 살아가다가 

1년 후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게 되고

그 충격에 따라 죽었다는 소리도 있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해선 그 어떤 자료로 없다.

사실 최후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고종의 뒤엔 명성황후가 있었고

명성황후 뒤엔 진령군이 있었다. 

 

조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화기 시기에

고종과 민비를 휘두르며 조선을 망가뜨린

무녀 '진령군' 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나게 된다. 

언제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사건들은 현재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고

이렇게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를 거울삼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조선 파국의 시작 _ 명성황후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