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들도 있을 정도로
조금씩이나마 인식이 달라지고 있지만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일이었다.
특히 아들을 꼭 낳아야만 하는 의무 같은게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이를 못 낳은 부부. 특히 여자의 경우 꽤나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직, 간접적으로 많이 느껴봤을 것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러한 분위기였는데
조선시대. 그 시절의 왕의 아내, 즉 중전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아들을 낳지 못하면 후궁을 데려와서 낳고 했던 건 어느 정도 알겠지만
그 중전의 대우가 어땠을지 생각해본적 있는 사람?
그래도 중전인데 뭘 어쩌나, 그냥 똑같지
Or
후계자를 못 낳았으니 입이 있어도 할말없지
이 정도로 의견이 갈릴 듯 한데,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왕마다 다르긴 했다. 딱히 정해진 처우는 없었다는 이야기지만
당연히 탐탁지 않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났는데 혼자 내버려두고 피난도 가고 ,
아내 빈소도 그냥 들렀다가 가버리고..
자식을 낳지 못한 왕비(중전)의 삶
조선시대에는 특히 자식이 중요했는데
당시에는 사람 한명의 노동력이 중요했다 보니 자식을 꼭 낳아야 했고
왕가에서는 계승을 위한 남자아이를 반드시 낳아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중전이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1595년 15살의 나이로 선조의 아내가 된 의인왕후
안타깝게 선조와의 결혼생활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의인왕후는 일찍 어머니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피게 되는데
광해군은 직접 양자로 들이기도 했다.
선조와 의인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다 보니 그리 돈독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선조의 사랑은 궁녀였던 공빈 김씨, 인빈 김 씨 에게로 향한다.
특히 인빈 김 씨는 선조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되니 인빈 김 씨와 선조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자 선조의 4남인 신성군을 왕세자로 만들려고도 했었다.
그러던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
결국 선조는 의인왕후, 후궁 등등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가는 도중
군민들에게 막혀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졌다가
이로부터 3년 뒤인 1595년이 되어서야 선조와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1597년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렬되면서
총 14만의 국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하는데
또다시 선조는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선조가 의인왕후는 버리고 후궁들만 데리고 피난을 가버린 것
얼마나 싫어하면 왕비를 내버려 두고 피난을 가지?
의인왕후도 어쩔 수 없이 세자 광해군을 데리고 따로 피난을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왜군이 철수할 때까지 환도하지 못하다가
1599년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인왕후는 피난 도중 결핵을 앓기도 하고 너무 힘들었던 것인지
1600년 45세의 나이로 끝내 사망하게 된다.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남편 선조는 정말 슬퍼했다고 하고 후회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자식은 못 낳았지만 인품은 정말 엄청났다고 한다
다른 후궁들의 자식들 역시 친자식처럼 챙기기도 했고 ,
선조의 법적 어머니였던 인순왕후와 큰 어머니였던 인성왕후를 정성스레 모시면서
두 대비들에게 총애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영조의 아내 정성왕후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는데
사망할 때까지 33년이나 왕비로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역대 조선 중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이기도 한데,
이 정성왕후 역시 자식을 낳지 못했고
남편 영조와의 사이가 ‘진짜 최악이다 ‘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좋지 못했다.
그만큼 둘 사이의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영조는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버리고
본인은 경희궁에 따로 있었다고 한다.
요즘식으로는 거의 별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데, 창덕궁에 찾아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둘 사이가 좋지 않자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이 있는데
세자빈 (왕비의 며느리)의 거처로 들어가는 진상품 보다 왕비의 거처로 들어가는 진상품이 더 많았던 일도 있었고
이 외에도
1743년 정성왕후는 통증을 호소하게 되었는데 영조는 엄살을 부린다며 꾀병 취급을 하며 찾아가지도 않았다.
심지어 정성왕후를 진찰한 의관도 영조에게 이야기해봤자 듣지 않을 것으로 판단.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보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정성왕후의 회갑이 되었는데 , 신하들의 의견에도 아내의 회갑잔치까지 막아버리고는
사도세자에게도 회갑잔치 같은 건 생각도 말라도 글을 보냈다고 한다.
정성왕후는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꼈는데
그렇기에 이런 글을 보낸 걸로 보인다.
결국 정성왕후는 회갑 잔치를 치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도세자는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고 통곡을 하는데
마침 이 모습을 본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의관을 제대로 하라는 꾸지람만 하고 빈소를 떠나고는
우연히 같은 시기에 사망한 사위의 문상을 갔다.
이것만 보더라도 영조의 자식을 낳지 못한 정성왕후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의인왕후, 정성왕후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식이 없는 중전의 삶이 얼마큼 비참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모두가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았던 건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우는 왕마다 달랐는데
자식이 없어도 평탄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도 있다.
그 예가 바로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1762년 만 8살의 나이에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혼례를 치르는데
혼인 4개월 만에 시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러자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국 홍 씨와 효의왕후를 불러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니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명한다.
하지만 효의왕후는 시어머니를 보필해야 하니 돌아갈 수 없다 말하게 되고
영조는 혜경국 홍 씨의 친정으로 함께 가는 걸 허락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궁으로 들어오라 명했다.
당시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가 조카인 정조에게 엄청난 집착을 하면서
세손빈이었던 효의왕후에게 시집살이란 시집살이는 다 시키고
둘의 사이를 질투해 이간실도 시키며 초반에는 정조와 효의왕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효의왕후는 상상임신도 여러 번 했을 정도로 임신에 간절했지만
아이를 갖지는 못했다. 여러 정치적 이유까지 더해지며 당연히 이렇다 보니 둘의 사이는 가까워 지기 힘들었다.
그런데 효의왕후는 어릴 때부터 심성이 곱고 인성이 좋았던 사람으로
고달픈 시집 살에 이간실 시키던 화완옹주에게도 끝까지 예를 갖췄다고 한다.
이외에도 후궁의 자식들도 친자식처럼 여기며 후궁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하며
시어머니 혜경궁 홍 씨뿐만 아니라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도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시누이들과도 우애가 대단했다고 하니 없던 마음도 생길 수밖에.
시간이 지날수록 정조와의 부부관계가 점차적으로 회복된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사이가 발전됐다는 것을
효의왕후가 친자식처럼 키운 순조가 효의왕후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보고
정조가 매우 흡족해했다 라는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식이 없는데도 후계와 관련해서 아무 문제도 안 일으키고
후궁의 자식들도 친자식 처럼 키우는데 싫어할 수가 없지..
효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이후에는 시어머니 혜경국 홍 씨가 노년에 투병할 때
직접 병시중을 하기도 했다는데 이때 효의왕후 나이가 환갑이 넘은 나이였으니
다시 한번 리스펙!!
하여튼 이 정도는 해야 애가 없어도 남편이 싫어하진 않았다 보다
애 안 낳는다고 쫓겨날 일 없는 오늘날에 감사하며 _ 끝
**사극에서는 당시 왕비가 살아있으니 중전이라 부르는 것이고
왕비는 왕의 정실을 말한다.
왕비가 죽고 나면 왕후라는 시호를 받게 되어 현재 우리가 인현왕후 등등으로 부른다.
조선 예법으로 파고들면 복잡해져서 간단하게는 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중전과 왕비가
왔다 갔다 하는데 그냥 같은 의미로 쓰였다는 걸 기억해주시길.
조선시대 아이를 낳지 못한 왕비(중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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