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나요?”
이 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비
그리고
가장 많은 미움을 받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굶주린 시민들을 외면하면서도 온갖 사치를 일삼아
희대의 악녀로 평가받기도 했던 그녀였는데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망언을 남긴 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당시 다른 왕족들에 비해 검소했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는 온갖 루머에 휩싸여
국민에게 미움과 조롱을 받으며
결국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프랑스혁명이
647개의 아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목걸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
과연 어떤 목걸이였길래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그리고 그녀는 왜
그렇게 미움받아야만 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 _ 프랑스혁명의 시작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 앙투네트의 본명이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마리아 안토니아가 프랑스로 오면서
프랑스 식 이름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바뀌어 불리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
마리아 체레지아의 열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예술의 나라 오스크리아에서 태어나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하프 연주에 소질을 보이는
착하고 평범한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얼마가지 못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14살이 될 무렵
루이 16세와 결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오늘날 독일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프로이센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세력을 넓힐 필요가 있었고
옆 나라인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프랑스도 오스트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게 된다.
- 국민이 미워한 왕비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었다.
사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중세 시대 이래로 수백 년 동안
앙숙관계였기 때문인데
어린 나이에 적국으로 시집을 가게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국적은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오스트리아 왕실에서 입고 온 옷을 모두 벗은 후
프랑스 왕실의 옷으로 갈아입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괴롭게 한 건
오스트리아와 너무나 다른 왕실 문화도 한몫했는데
왕족이어도 어느 정도 사생활이 보호되었던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는 모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당시 프랑스 왕실은 선대 왕들로부터 이어진 예법과 절차로 가득했고
화려함과 사치가 극에 달해있던 시대였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녀를 힘들게 한 건 또 있었는데
바로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루머들이었다.
프랑스는 루이 16세가 집권하던 당시
이전 왕들의 사치로 국가재정이 매우 궁핍했던 상황이었고
때문에 국민들은 귀족과 왕족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는데
수백 년 동안 원수로 지내던 오스트리아에서 온 공주가 왕비가 되었으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욕하기 좋은 타깃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름이나 존칭 없이
‘오스트리아 여자’ 라고 부르기도 했고,
욕이 섞인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는데
마침,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할 명분도 있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는 결혼한 지 7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이 16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정부(후궁)를 들이지 않았는데
이게 당시 국민들에겐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왕족들이 정부를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 었던 터.
직전 왕이었던 루이 15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정부를 위한 방을 따로 만들어 줄 정도였으니..
상황이 알만도 하다.
정부를 두지 않는 왕
아이를 낳지 않는 왕비
사람들이 루머를 만들기 딱 좋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근거 없는 루머가 돌기 시작한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 퍼졌던 루머는 꽤나 자극적이었다는데
‘왕비가 왕에게 만족을 못해 매일 밤 다른 남자들과 파티를 벌인다더라’와 같은
소문부터 동성애를 한다는 소문까지 퍼졌었다.
이런 소문은 단순한 입소문에서만 끝나지 않고
적나라한 그림과 함께 팸플릿까지 만들어져
프랑스 전역에 뿌려지기도 했다.
그렇게 프랑스로 온 후 몇 년 동안 악질적인 소문에 시달리던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 7년 만에 드디어 아이를 낳게 되면서 상황이 좀 나 아기나 싶었는데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를 향하게 한 목걸이 사건이 터진다.
- 목걸이 사기 사건
1772년 루이 15세는 자신이 아끼던 정부. 뒤바리 백작부인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파리의 유명 보석상 샤를르 보이머에게
최상급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게 된다.
뵈이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최상급 다이아몬드 647개를 모아 목걸이를 만들었다는데
이게 당시 2백만 리브르.
우리 돈 약 200억 원이 넘는 천문한적 사치의 보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목걸이가 완성되기 직전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갑작스레 사망해 버리면서
루이 16세가 왕이 되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는데
이때 평소 마리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뒤바리 백작부인은
권력을 잃고 궁전에서 쫓겨나 버렸고
그렇게 목걸이를 사 갈 사람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전 재산을 투자해 목걸이를 만든 뵈이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대신 목걸이를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목걸이 살 돈이 있다면 군함 한 척을 사는 게 더 낫겠어요”
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렇게 천문학적인 가치의 목걸이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다.
한편,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자
초조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드 로앙 추기경인데
드 로앙 추기경은 성직자 신분으로 부정부패와 방탄한 생활을 일삼아
마리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드 로앙 추기경에게 한 여인이 찾아온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으로 알려진 라모트 백작부인.
그녀는 추기경에게 왕비의 친필 편지를 전했는데
왕비가 그를 베르사유 궁전에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왕비와 추기경은 짧은 만남을 갖게 되는데
왕비는 과거의 일은 잊겠다는 약속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고
뭔가 미심쩍은 화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만나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추기경은
라모트 백작부인에게 왕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원한다고 얘기해준다.
다만, 현재 프랑스의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해
공식적으로 구입하는 것은 국민들의 눈치가 보이니
대신 구매해달라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입성해 재상으로 출세하고 싶었던 추기경은
왕비의 친필 문서를 담보로
일부 계약금을 낸 후 목걸이를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라모트 백작부인에게 넘겨준다.
그런데 목걸이를 넘겨준 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어떠한 연락이 오지 않았는데
조급해진 추기경은 결국 왕비를 직접 찾아가게 된다.
하기만 황당한 일이 일어나는데
왕비는 목걸이를 원한적도 받은 적도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목걸이값을 지불한 추기경.
계약금을 받고 목걸이를 넘겨준 보석상 뵈이머.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마리 앙투아네트
과연 어떻게 된 걸까
사건의 진실은 이러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으로 알려진 라모트 백작부인은
사실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다는 소문은 본인이 낸 것이었고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라모트 부인은 뵈이머가 엄청난 목걸이를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눈 밖에 나
초조해 있던 추기경을 이용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챌 계획을 세운 거였다.
가짜 편지를 만들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닮은 사람을 고용해
추기경이 자신을 믿게 만들어
목걸이를 가로채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결국 재판을 통해 라모트 부인의 사기행각이 모두 밝혀졌는데
하지만,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발칵 뒤집힌다.
왕실에서 벌어진 천문학적 가격의 목걸이 사기극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자
빈곤에 시달리던 프랑스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 분노의 화살이 모두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향한 건데
국민들은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걸이를 샀고
그걸 덮기 위해 라모트 부인에게 누명을 씌었다고 믿은 것이다.
게다가 혁명군의 도움을 받아 탈옥한 라모트 부인이
영국으로 도망가 자신은 분명 왕비에게 목걸이를 전달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본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맞다며
거짓말을 해버린 건데
이후 밝혀진 바로
라모트 부인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빼돌려 조각낸 후
모두 팔아버렸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사실을 알리 없는 프랑스 국민들은
근거 없는 라모트 부인의 거짓말을 사실처럼 믿었고
곧 목걸이 사건은
1789년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1793년 10월 14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재판소에 끌려오게 되는데
혐의는 다양했다.
사치로 국고를 낭비했고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적국과 내통해 프랑스 국민을 기만했다.
그리고 8살 난 자신의 아들과 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것이
그녀가 받은 혐의였다.
온갖 죄목을 뒤집어썼던 마리 앙투아네트였지만
그 어떤 혐의도
뚜렷한 정황이나 증거가 없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지만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엄마로서 이 혐의에 관해서 동의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여기 있는 모든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동조했지만
당시 혁명정부에게 지독한 학대를 받고 있던 그녀의 아들
루이 17세는 거짓 자백을 하게 됐고
결국 마리앙투아네틑 사형선고를 받아 이틀 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다.
647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기극.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사기극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 …
인생 참..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가 죄 없이 깨끗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당시 프랑스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프랑스 기득권자에게는 누구나 잘못이 있었고
국가를 이끌어 가는 왕과 왕비라는 자리에 책임이 있으니 말이다.
다만 당시 프랑스는 극심한 격동기를 겪고 있었고
그걸 이끌기에는 그저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평범한 공주였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로 생을 마감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만약 다이아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화 및 소설 등 각색이 다르게 되어있어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며 목걸이 이야기도 하나의 소문으로
100%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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