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세계 인구의 절반을 지배하고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한 몽골제국
세계의 정복자로 꼽히는 ‘이 사람’ 에서부터 시작됐다.
왕 중의 왕
끔찍한 학살자 칭기즈칸
칭기즈칸은 극과 극의 평가를 받으면서도
1995년 <워싱턴포스트>에서
‘지난 10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이자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역사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바로 그가 사망한 지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을 수 없는
그의 무덤.
무덤의 위치에 대한 어떤 단서도 알 수 없고
탐사 기간마다 사건, 사고 들이 일어나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으려 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소문도 있다는데
진시황릉 , 피라미드, 조조의 왕릉
한 시대를 정복했던 지배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는데,
왜 세계를 호령했던 칭기즈칸의 무덤은
왜 아직 알려지지 않을 것일까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칭기즈칸의 무덤에 대한 소문을 파헤쳐보자.
칭기즈칸 무덤의 비밀 _ 무덤의 저주
#세계 정복자 칭기즈칸
칭기즈칸,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그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진 노래도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히트 친 노래였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침략자를 미화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적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
아시아도 아닌 유럽, 독일의 팝 그룹이다.
과거 자신들을 침략했던 칭기즈칸에 대한 노래를 낼 정도면
유럽인들에게도 칭기즈칸이 굉장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을 듯한데
그렇다면 칭기즈칸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일까
본명 보르지긴 테무친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칭기즈칸’으로 불리게 된 건
1206년 부족 국가였던 몽골을 통일하면서부터이다.
‘칸’ 은 군주, 왕을 의미하는데
‘칭기즈’에 대한 의미는 여러 가지 썰이 있다.
‘위대한, 위엄을 갖춘 ‘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바다’라고 해석해
‘바다와 같이 넓은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다’라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헌 기록이 없어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칭기즈칸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 저
그와 같은 칭호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을 통일하며 왕의 자리에 오른 칭기즈칸은
몽골 초원 밖의 세상으로 정벌에 나서는데
이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금나라에 밀려 후퇴한 송나라
요나라 왕족이 세운 서요, 실크로드 길목에 자리 잡은 탕구르트족의 서하까지 점령한다.
이렇게 점령한 땅은 약 777만 km²로
알렉산더 대왕 (348만 km²)
나폴레옹(114만 km²) 이 차지한 땅의 합보다
칭기즈칸이 차지한 땅이 더 넓었으니
그가 얼마나 넓은 영토를 점령했는지 집할 할 수 있다.
#정복자의 리더십
그런데, 칭기즈칸이 지금까지 최고의 정복자로 불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그의 남달랐던 리더십이다.
칭기즈칸은 그의 군대를 만들 때
계급, 종족, 종교를 차별하지 않으며
오징 능력이 있는 인재라면 누구든지 등용했다고 하는데
이를 보여주는 일화도 있었다.
한 전투 도중, 적국이 칭기즈칸의 말을 화살로 명중시켜
그가 낙마하게 됐는데, 칭기즈칸은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살아남은 적군들을 모아 자신의 말을 쓴 자를 찾아냈고,
그에게 이름까지 하사하며
자신의 부하로 받아들여 줬다
그뿐만 아니라 활약에 따라 전리품을 동등하게 배분했으며
만약 전사한다면 전사자의 가족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는 등
현대식 성과급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에는 파격적인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몽골 초원의 수많은 부족은 칭기즈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뛰어난 인재들을 얻은 칭기즈칸은 몽골 대제국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위대한 정복자의 죽음
세계 역사상 최단기간에 최대 영토를 점령한 칭기즈칸
무서운 기세로 국가들을 점령하며
불멸의 존재로 남을 것만 같았던 그였지만,
1227년 서하를 원정하던 중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때
지금까지도 우리가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바로 행방이 묘연한 칭기즈칸의 무덤이다.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몽골인조차 칭기즈칸의 무덤을 알지 못한다라고 언급했고
현재까지도 그의 무덤에 관해선 밝혀지지 않았는데
무덤의 미스터리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서하 탕구르 사람에게 칭기즈칸이 두 번째로 원정하여 무찌르고 돌아와
돼지해(1227)에 하늘로 올랐다.’
몽골 역사서인 몽골비사에는
칭기즈칸의 죽음과 관련해 딱 한 줄의 기록만 남아있다.
대제국을 건설한 왕의 죽음을 기록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짧은 기록인데
이렇게 기록이 짧은 건 그의 유언 때문이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우리에겐 이순신 장군의 유언으로 익숙한 이 말을
칭기즈칸도 유언으로 남겼다는데
당시 서하 왕이 투항을 밝혔고,
전쟁의 끝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던 터라
칭기즈칸은 자신의 죽음을 서하 왕이 알게 되면
항복하지 않을까 봐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칭기즈칸의 사망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고
낙마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정설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전투 중 부상에 의한 사망이다, 독살이다 등의
여러 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렇듯 칭기즈칸은 자신의 죽음을 철저히 숨기며
무덤의 위치까지 미스터리로 남겼는데
그럼 그는 어떻게 무덤을 숨겼고
우리는 왜 아직까지 칭기즈칸의 무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걸까
#사라진 칭기즈칸의 무덤
기록에 따르면 수천 명의 군인과 노예들이 참여해
엄청난 규모의 무덤을 만들었고
수많은 여자와 말들이 그 무덤에 함께 묻혔다는데
또 무덤의 위치를 알지 못하도록 관을 운반하며 마주친 사람들은 물론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도 모조리 죽였고
장례 후에는 수천 마리의 말을 이용해 무덤을 평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의 권력과 힘을 상징할만한 엄청난 양의 보물들이
무덤에 숨겨져 있을 거라 추측하며
몽골 전역을 탐사하기도 했었는데,
무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몽골제국 역사서 원사에서 하나의 단서가 발견된다.
청기즈칸이 ‘기련곡’에 묻혀있다.
하지만 기련곡이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명칭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고
추정되는 몇몇 장소만 거론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부르칸칼둔
부르칸 칼둔은 바이칼 호수 서남부에 있는데
칭기즈칸이 살아있을 당시 이곳에서 사냥을 즐겼고
어느 날은 큰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그곳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전해져
무덤이 부르칸 칼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또 다른 곳은
#포두지역
이곳에는 칭기즈칸의 능이 있기도 하다.
물론 그가 실제로 묻혀 있지는 않다.
내몽고 포두지역이 칭기즈칸의 무덤이라고 추측되는 이유는
몽골의 전통 때문이다.
몽골에서는 말채찍을 떨어뜨린 장소를
자신의 무덤으로 만든다는 전통이 있는데
칭기즈 캉이 이곳에서 말채찍을 떨어뜨린 적이 있다고 해서
포두 지역을 기련 곡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마지막
#델리운볼닥
델리 운볼닥은 칭기즈칸의 고향이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죽으면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다고 하여
이곳을 칭기즈칸의 무덤이라고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고
무덤의 위치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2001년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와 300km 떨어진 곳에서
60여 개의 봉분이 발견되며 세계가 들썩였는데
봉분들은 3미터 높이의 돌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사람들이 만든 흔적이 분명하게 보였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봉분의 규모에 1992년부터 칭기즈칸 무덤을 찾아다닌
미국의 발 국대 대장 모리 크라비츠가
미국, 몽골 연합 발굴단을 이끌고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발굴 당시 13세기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발견되면서
칭기즈칸과 함께 묻힌 여성의 유골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칭기즈칸 무덤 발굴 소식이 현지에 퍼지자
몽골인들의 반대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몽골의 영웅인 칭기즈칸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그의 유언에 대한 모독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탐사대는 들끓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탐사를 강행했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돌풍이 불어 돌들이 낙하하면서
탐사원들이 부상을 입고,
발굴단 차량 운전자는 알 수 없는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연달아 발생한다.
그리고 의문의 사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탐사구역 인근에 탄저병이 돌기 시작하며
발굴단이 있는 지역에 격리 조치까지 내려진 것이다.
잇따른 사건 사고에 모리 크라비츠가 이끄는 발굴단은 결국
탐사작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이 사고를 칭기즈칸의 저주라 생각했고
더 이상 그의 무덤을 찾아서는 안 된다며
이후 많은 발굴단들의 탐사작업을 반대했다.
그러다 결국 몽골의 반가반디 대통령은
칭기즈칸 무덤 발굴을 금지시켰고
현재까지도 칭기즈칸의 무덤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아,
결국 칭기즈칸의 무덤은 미스터리로 남아버렸다.
아시아, 중도,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하며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제국으로 만든 칭기즈칸
그의 잔인한 학살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지만
칭기즈칸이 있었기에 동서 문화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었고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로’을 쓸 수 있었던 터라
그가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또 칭기즈칸의 무덤에 실제로 보물들과 기록이 매장되어 있다면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의 비밀들이 발견될 수도 있으니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칭기즈칸의 무덤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칭기즈칸의 무덤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
즉, 유목민 정신에 따라 그의 무덤을 따로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누구에게도 알려지고 싶지 않았던 그의 바람대로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는 칭기즈칸의 무덤
과연 어디에 있을까
칭기즈칸 무덤의 비밀 _ 무덤의 저주
'해외역사 & 미스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몰락 _ 아편전쟁의 시작 (0) | 2022.07.10 |
---|---|
더이상 전설이 아닌 아틀란티스? 사하라의 눈과 숨 막히는 공통점 (0) | 2022.07.03 |
중국 3대 악녀 여태후 _ 인간돼지를 만들다 (0) | 2022.06.15 |
중국의 3대 악녀 측천무후 _ 남자 3000명과 즐겼던 여황제 (0) | 2022.06.08 |
마리 앙투아네트 _ 프랑스혁명의 시작 (0) | 2022.06.06 |
댓글